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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넘어 피어난 우정, 심우성선생님

풍요로운 사진 인생을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

by Sylvia 실비아

딸: 아빠, 오랜만에 공주에 가서 심하용관장님(심우성선생님의 아들로 현재 한국민속국박물관 관장)을 뵙고 나니 심우성선생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졌어요. 예전에 그 탈 33종 사진 찍은 이야기 좀 다시 해줘요. 그거 처음 얘기 들었을 때도 인상 깊었는데, 오늘은 자세히 듣고 싶어요.


아빠: 그래, 그 얘긴 좀 길어. 옛날에 심우성 선생이 나한테 부탁을 했었어. 우리나라 전통 나무탈 33종이 있는데 그걸 하나하나, 마치 제품 사진처럼 정확하게 찍어달라고. 내가 스튜디오 할 때였으니까 말이지. 그게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찍어보니까 간단한 일이 아니더라고.


딸: 탈이 뭐 크고 복잡해서 그래요?


아빠: 그것도 그렇고, 탈 자체가 입체적이잖아. 색도 톤이 시큼덩덩하고 번들거리는 것도 있고, 나무질감에 따라 느낌도 다르고. 근데 그걸 사진에 담으려면 배경이 중요해. 그래서 한지, 닥종이, 회색 천, 심지어 책에 글씨 써진 벽지도 써보고 별걸 다 해봤지.


딸: 그럼 결국 어떤 배경이 제일 좋았어요?

001-한국의 나무탈33종.JPG 한국의 나무탈 33종 - 사진 박옥수

아빠: 검정. 그냥 진한 검정 배경. 그것만이 탈의 모양, 색감, 질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더라. 다른 배경은 다 묻혀버리거나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해. 검정색은 탈을 ‘딱’ 고정시키는 힘이 있어. 무게감도 생기고. 그 사진들이 나중에 박물관 자료로도 쓰였고, 심 선생님이 그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지. 그분이 인사동에 사무실이 있던 시절이야. 나한테 나무탈 33종을 조그만 박스에 담아서 가져왔어. 하나씩 꺼내서 조심조심 찍었지.


딸: 근데 아빠, 심우성 선생님이 어떻게 아빠한테 탈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게 된 거예요? 그 당시엔 아빠 광고 사진으로도 이름 좀 날리던 시절 아니었어요? 민속 탈이랑은 전혀 다른 분야잖아요.


아빠: 그건 참 우연한 인연이었지. 일부러 찾아온 게 아니라, 어느 날 술자리에 합석하다가 알게 된 거야. 그 시절엔 인사동이나 대학로 같은 데 가면 예술 하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부딪히고 말 붙이고 그랬거든. 처음 만남은 김영수 씨를 통해서였어.


딸: 김영수 아저씨? 우리 같이 주문진에 놀러가던? 딸 삐삐랑?


아빠: 그래, 그 양반. 너도 기억하지? 성격이 뭐랄까, 자유분방 그 자체였지.


딸: 완전 달랐잖아요, 아빠랑. 그 아저씨는 어딜 봐도 '나 예술가요!' 를 뿜뿜하고 다니는 느낌이고, 아빠는 딱히 말 안 하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티도 안 나고. 극과 극.


아빠: 하하, 맞아. 사람들이 아빠랑 김영수랑 둘이 그렇게 다른 사람 둘이 친하게 같이 어울리는 것을 신기해 할 정도였지. 그렇지만 사실 사람이 극과 극이니까 더 가까워질 수도 있고 그 따져보면 김영수 씨를 통해서 심선생을 만난 거라고 또 볼 수 있는 거야. 그 사람들 스타일이 다 그랬지. 저녁만 되면 대학로 근처 술집 비슷한 데서 모여 앉아서 한잔씩 하면서 예술 얘기하고, 정치 얘기하고, 시국 얘기하고. 말 그대로 ‘문화판’이지.


딸: 혜화동에서요? 그런 자리가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예술가들끼리 교류가 자연스러웠나 봐. 요즘은 SNS가 있지만, 그때는 그런 자리가 SNS였겠네.


아빠: 맞아. 대학로, 인사동, 혜화동 이런 데는 예술가들 아지트였지. 거기서 맥주 마시며 예술 이야기하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배우는 그런 시절이었어. 심 선생도 그 무리 중 한 분이었지. 지금은 이름은 생각 안 나는데, 진짜 특이한 곳이었어. 가게라기보단... 구멍가게 같은 데였어. 한 여자 화가가 운영했는데, 이름이 임경숙. 프랑스 유학 다녀온 실력자였지. 그 당시에도 패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지금도 미술활동을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 그 분이 아주 독특한 감성이 있었던 사람인데 그 방 하나 크기 가게에서 예술가들이 맥주 마시고 앉아 수다 떨고 그랬어.


딸: 임경숙 화가를 찾아보니 1985년 파리 퐁피두센터의 첫 동양여성작가로 이름을 올린 글로벌 아티스트네요. 그런 분이 혜화동에서? 아빠 말을 들으면 그것은 완전 지금 말하는 빈티지 카페 느낌이네요. 그럼 거기서 심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아빠: 응, 맞아. 어느 날 김영수랑 같이 가게 됐고, 거기서 심 선생이 계시더라고. 거긴 무슨 술집도 아닌데, 분위기가 딱 예술판인 거지. 사람들은 오고 가고, 맥주 세 명분 계산하고 가고. 화가인 임경숙 씨가 운영하던 그곳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어.


딸: 아빠, 완전 '서울예술사' 그 자체네요.


아빠: 그러니까, 지금 보면 그게 다 역사더라고. 이후에 심 선생이 인사동 사무실로 초대했어. 그게 ‘서낭당’이라는 이름의 극단이었는데, 그게 말하자면 간판만 있고 본인은 민속극, 공연, 민요 이런 거 다 아우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지. 극단 이름 걸고, 민속 자료들 정리하고 계셨던 곳인데, 사무실이라고 보면 돼.


딸: 그리고 거기서 탈도 본 거예요?


아빠: 응. 그때 탈을 모아두고 계셨는데, 어느 날 내가 찍은 제품 사진들을 봤었나 봐. 탈도 그런 식으로 정직하게 한 번 찍어보자고 하신 거지. 나한테 '이거 한번 제품 사진 찍듯이 정갈하게 찍어줄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고. 내가 예전부터 그런 정밀한 촬영 스타일로 알려졌으니까. 그렇게 해서 탈 33종을 찍게 된 거지. 원형 탈을 복원한 나무탈이었는데, 심우성선생님의 아버지인 심이석옹이 재현한 것들이었어. 조각도 정교하고 색도 직접 칠한 거야. 조명 하나 잘못 맞으면 그림자 생기고, 배경 잘못 쓰면 질감이 묻히고. 그래서 더 신중하게 촬영했지. 그분은 진짜 현장 민속학자였어. 말로만 민속학자 아니라, 직접 땅 밟고 사람 만나서 체험한 걸로 기록을 남긴 분이지. 심이석옹을 모시고 살았는데 거기, 신당동 현대아파트에도 가서 그 할아버지가 방상시탈을 만들고 계신, 그 장면도 내가 찍었어.


딸: 그건 그냥 사진이 아니라 민속 다큐멘터리네요. 그렇게 보면 아빠는 민속 기록자의 역할을 충실히 한 거네~


아빠: 그래서 더 신중했지. 공주에 박물관 짓는다고 할 때도, 그 상량식에 같이 갔어. 할아버지가 직접 상량문 쓰고, 나는 그걸 또 사진으로 남겼고. 사진이란 게 그런 거야. 그냥 멋있는 장면이 아니라, 그 시대의 공기와 맥락을 담아야지.


딸: 아빠랑 심 선생님은 딱 좋은 파트너였던 것 같아요. 심 선생님은 말도 구수하고 글도 구수하게 잘 쓰시잖아요.


아빠: 그 양반은 글도 쉽게 써. 구어체로, 아주 편하게. 어려운 말을 안 써. 도올 김용옥하고 닮았어. 깊은 얘기를 아주 쉽게 잘 풀지. 공연 사회도 많이 봤어. 말 한마디에 맥을 짚는 그 솜씨는 지금 들어도 감탄할 수준이지. 그냥 설명이 아니라,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꾼이었지.


딸: 그러니까 대중이 그분을 좋아하셨던 거구나. 어려운 말로 멋 부리기보다 그냥 살결 닿는 말로.


아빠: 맞아. 그래서 그분이 사회도 많이 봤어. 공연에서 말이야. 민속 춤 공연도, 국악 공연도 그 양반 목소리로 시작하면 분위기가 착 가라앉으면서 집중이 됐지. 그 양반이 특이한 사람이야.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이면서도, 정작 진짜 정체성은 ‘현장 민속학자’였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책상 앞에서 이론만 쌓는 학자들이 아니라 직접 땅 밟고 사람 만나고, 말 그대로 우리 삶을 기록하는 사람이었어.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남사당패도 재조명되도록 하셨지. 그 시절엔 남사당패가 거의 잊혀진 존재였거든. 근데 그 양반은 그런 걸 그냥 ‘보고만’ 있질 않았어. 지방 다니면서 숨겨진 재주꾼들을 찾아냈고, 그 사람들이 서울에서 공연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준 거지. 그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중 제일 인상 깊은 건 역시 사물놀이야. 그 이름도 심 선생이 지은 거다. 사물, 네 가지 악기. 아주 단순하지만 딱 맞는 말이지.


딸: 헐, 사물놀이요? 그거 진짜 세계 다 돌았잖아. 근데 그 이름도 심 선생님이 지었다고요?


아빠: 그래. 처음엔 김덕수, 이광수 같은 젊은 연주자 네 명이 사물 네 가지 악기를 들고 공연하겠다는데, 이름이 없잖아. 그래서 심 선생이 ‘사물놀이’라고 딱 지어준 거야. 단순하고 강하잖아.


딸: 완전 프로듀서네요. 지금으로 치면 한류 아이돌의 프로듀서 같은? 아, 아빠는 진짜 좋았겠다. 그 시대를 직접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아빠: 정확해. 그 양반 집도 원래는 꽤 부잣집이었어. 만석군 집안이라고 했지. 근데 세월 흐르면서 그런 것도 다 흘러가더라고. 한 번 크게 사업이 무너지면서, 여유롭던 시절은 끝났지. 그래도 그분은 포기 안 했어. 심 선생은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잊혀진 걸 다시 살려내고, 또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힘이 있었어. 그뿐이 아니다. ‘먹거리’라는 단어도 원래 심 선생이 쓴 말이야. 그 당시 풀무원이랑도 연결해서 우리 음식 문화도 보존하고 알리고, 전국 돌면서 강의하고 다녔지.


딸: 그런 걸 보면… 참 집요하면서도 애정이 깊은 분이셨네요. 이 정도면 문화계의 숨은 건축가네. 무대 짓고, 이름 붙이고, 사람 세우고! 아시아 1인극제도 결국 심우성 선생님이 처음 시작하신 거죠?

2000년5회공주아시아1인극제.png 2000년 제5회 공주 아시아 1인극제 - 사진 박옥수

아빠: 그렇지. 말 그대로 창립자야. 1인극이라는 장르 자체도 생소했던 시절이니까. 누가 혼자 나와서 연극을 한다고 하면, 다들 의아해했지. 게다가 그걸 유료 공연으로 열려면? 어림없지. 근데 그 1인극 배우들이 대단했던 건, 관객이 한 명이라도 무대를 올렸다는 거야. 그게 몸에 밴 사람들이었어. 공연은 관객 숫자랑 상관없이 ‘해야 하는 것’이었지.


딸: 진짜 멋지다. 뭐랄까, 장르 자체도 그렇고... 무대라는 공간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었구나.


아빠: 맞아. 그래서 공주에서 그걸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만들어낸 거야. 심 선생이 공주에 민속극박물관 세우고, 그 주변에서 아시아 1인극제라는 걸 시작했지. 그 당시는 본인도 1인극 배우로 활동을 열심히 하셨고… 지금은 거창으로 장소가 옮겨졌지만, 뿌리는 거기야.


딸: 거창에서 계속 하고 있대요? 아, 다행이다. 그런 게 끊기면 너무 아쉽잖아요.


아빠: 다행히 제자 중에 한대수라는 친구가 그걸 이어받았어. 그 친구가 그걸 회사처럼 운영하고, 본인이 다 하긴 어려우니까 유진규라는 마임 배우를 총감독으로 데려온 거야. 춘천 마임협회 출신이거든.


딸: 아, 유진규 배우님 알아요! 요즘도 활동 많이 하시던데?


아빠: 그 사람은 발이 넓어. 인맥도 좋고, 본인도 공연을 많이 하니까 전체 판을 끌고 가는 데 힘이 있지. 거창에서 요즘도 6월쯤 되면 축제처럼 열려. 외국 배우들도 오고.


딸: 그럼 진짜 심 선생님의 정신이 계속 살아있는 거네요. 후배들이 잘 이어가고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아빠: 그 양반은 그런 일 할 때마다 꼭 나한테도 연락을 했어. 사진 찍어달라고. 근데, 그냥 부탁만 한 게 아니라, 늘 봉투를 따로 챙겼지. ‘개런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태도였지.


딸: 그게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사진, 특히 기록사진을 대하는 태도가 늘 좀 아쉬웠는데... 심 선생님은 그런 감각이 있으셨구나.


아빠: 응, 항상 ‘기록은 문화다’라는 걸 알고 있었던 분이야. 그러니까 공연만이 아니라 그 공연을 어떻게 기록하고, 어떤 각도로 남길 것인지까지 생각했던 거지.


딸: 아빠는 진짜 그런 기록의 현장마다 꼭 계셨던 거네요. 문화의 뒤편에서 카메라 하나로 묵묵히.


아빠: 그래, 나는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내 방식으로는 뭔가를 하고 있었던 거지. 내 몫은 사진이었고, 심 선생은 말과 기획이었고. 같이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고 생각해.


딸: 그 사진들, 언젠가는 꼭 제대로 조명받을 날이 올 거예요. 기록은 그 자체로 숨 쉬는 거잖아요. 시간 지나도, 숨이 살아 있는 것처럼요.


아빠: 맞아. 지금은 많은 사진들이 내 서랍안에서 잠들어 있지만, 필요할 때가 오면 세상 밖으로 나올 거야. 그리고 그 사진을 보는 누군가가 “아, 이런 시대가 있었구나” 하고 느끼게 되겠지.


딸: 그게 바로 문화의 힘인 것 같아요. 지금 사라진 것들도, 누군가가 남겨줬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거. 아빠가 그걸 해낸 사람이네요. 그러니까 아빠가 더 열심히 SNS를 하고 출판도 전시도 하고 아빠 사진을 알려야 해요.



아빠: 고맙다, ㅎㅎ 그런 말 해줘서. 사진이란 건 그 순간엔 몰라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게 많거든. 그래서 나는 그 양반이 존경스러웠어. 이런 것들의 중요함을 다 알고 계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부드러움 속에 힘이 있고 민족학자로의 소명을 조용히 따르는 느낌이 있으신 분이셨지. 예를 들면, 딱히 무대 위에 서는 것도 아닌데, 모든 걸 받쳐주는 사람이랄까. 본인도 공부 열심히 했고, 목소리도 구수해서 방송에도 자주 나왔고. 그게 바로 진짜 민속학자의 기질이지. 그분이 가장 애착 가졌던 장소 중 하나가 ‘공간 사랑’이라는 공연장이었어. 창덕궁 옆에 있는 김수근 건축가가 지은 곳이지. 그 공간 사랑에서 심 선생이 전국에서 발굴한 사람들을 무대에 세웠지. 예를 들면 공옥진 씨나,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물놀이도 거기서 데뷔한 거야.


딸: 아빠는 그 두 분,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랑 심 선생님 얘기할 때 유난히 애틋해요.


아빠: 그 두 사람은 내가 거절 안했던 사람들이야. 사진 찍자고 하면 무슨 약속이 있어도 미뤘지. 같이 일할 때마다 긴장도 되지만 기분도 좋았어. 준비도 철저히 했고, 결과에 대한 책임감도 남달랐지.


딸: 그분들도 아빠를 정말 믿었던 거겠죠.


아빠: 믿음이 없으면 그런 작업 못 해. 사진 찍는 사람만 힘든 게 아니거든. 찍히는 사람도 복식 챙기고, 마음가짐도 준비해야 해. 그래서 같이 만들어간다는 기분이 들어야 해.


딸: 근데 아빠가 그런 분위기 만드는 데 진짜 잘하잖아요. 조용히, 정확하게, 성실하게. 그래서 그분들이 아빠를 찾았던 거예요.


아빠: 하하, 그런가. 어쨌든, 난 심선생님이 부르시면 어디든 갔었지. 그리고 심선생님이 불러서 충무로 아빠가 하던 스튜디오에 많은 예술인들이 오게 되기도 했어. 근데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심 선생님이 한마디 하면 다들 얌전히 와서 줄 서고, 말없이 협조했지.


딸: 그게 뭔가 전염됐나 봐요. ‘진짜가 나타났다’는 느낌?


아빠: 그런 거지. 그리고 그 사람들도 알았을 거야. 이게 남는 거라는 걸.


딸: 맞아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기록. 시간이 지나도 남는 거.


아빠: 기록은 곧 책임이야. 나는 그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어. 그냥 ‘찍는 일’이 아니라, ‘남길 일’이었지.


딸: 아빠 사진은 결국 살아 있는 민속이네요. 박물관도, 논문도 아닌, 진짜 사람이 살고 숨 쉬던 그 장면들.


아빠: 멋진 해석이구나! 그래 맞다. 그래서 내가 내 역할은 사진이라고 생각해. 말보다 강할 때도 있지, 사진은.


딸: 아빠, 정말 멋있어요. 아빠 덕분에 나도 우리 문화에 더 애정이 생겨요. 그리고 심우성선생님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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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심우선 선생의 결혼굿 - 사진 박옥수

故심우성 선생은 1934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 서울중앙방송국 (KBS의 전신)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민속학자의 임석재 선생의 제안으로 민요 채록에 뛰어들었다. 탈춤, 농악 등 전통 예술을 수집하고 연구했으며, 특히, 천시받던 남사당패를 예인으로 격상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꼭두각시놀음'을 재연하고, 1965년 남사당 인형극회를 창단했으며, 1978년에는 처음으로 사물놀이를 무대에 올렸다. 또한 '사물놀이'라는 명칭을 창안하고, 남사당놀이가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되는 데 기여하는 등 우리나라 연희 분야 민속학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옥수 작가는 당시 심우성 선생의 연락을 받고 시간이 있을 때면 늘 그 현장에 갔다. 그의 사진은 바로 그 현장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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