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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그날의 함성

사진은 기록이 된다

by Sylvia 실비아

아빠: 오늘은 좀 다이나믹하게 얘기해볼까 한다.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서울의 역사, 그게 그냥 기록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그 자체가 역사가 되는 거거든.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서도 서울역 회군, 그날의 사진, 그날의 분위기… .


딸: 오, 아빠. 이거 완전 시커멓게 사람 바글바글한 거! 그거 얘기 좀 풀어주세요. 아빠, 오늘은 TMI 대환영이에요!


아빠: 그래, 그날이 1980년 5월 15일이었어. 그때는 대모, 그러니까 시위가 아주 많았지.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정권 잡고, 비상계엄령 선포하고… 그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야. 서울역 시위가 그 일련의 마지막 대규모 시위였지.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다 서울역으로 모였고, 다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결국 학생 지도부에서 “이제 각자 학교로 돌아가자” 결정을 내렸지. 그걸 ‘서울역 회군’이라고 해. 군대도 회군하듯이, 학생들도 각자 학교로 돌아간 거지.

19800515-000037-서울역민주화시위.JPG 1980년 서울역 민주화시위 - 사진 박옥수

딸: 아빠, 그거 완전 영화 같아요. 근데 왜 하필 그날 그렇게 다들 서울역에 모인 거예요? 서울역이 뭐, 요즘으로 치면 홍대입구역 같은 핫플이었어요?


아빠: 아니지. 그날은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서울역으로 집결하라는 사발통문(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빙 둘러가며 적은 고발 형태의 문서)이 돌았거든. 전두환의 계엄령 해제, 민주화 요구… 그런 구호를 외치려고. 근데 그날 군 투입 소식이 퍼지면서 학생 지도부가 자진 해산을 결정한 거야. 그게 바로 서울역 회군이지.


딸: 아빠, 근데 그 서울역 회군이랑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랑은 어떻게 연결되는 거예요? 그냥 동네가 달라서 따로 논 거 아니에요?


아빠: 아니지,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이 넘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했어. 하지만 군대 투입과 유혈 사태가 우려돼 학생 지도부가 시위를 해산하기로 결정했고,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멈춘 바로 다음 날(5월 16~17일), 신군부(전두환 등)는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과 야당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어. 그런데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중단된 반면, 광주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계속해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갔던가야.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는 시위가 다 멈추니까, 신군부가 이제 광주에만 집중적으로 군대를 보낼 수 있게 된 거고, 광주 시민들만 고립된 채로 군사정권과 맞서게 되었던거지. 그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으로 이어진 거야. 그 때는 무시무시한 시대였지. 대규모 유혈 진압이 벌어졌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어. 옛날에는 이렇게 말하면 아빠는 벌써 잡혀갔지.


딸 : 와아.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서는 많이 배우기도 하고, 영화도 있고 해서 알지만 이런 연결된 스토리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네요. 아빠 나 너무 무식하다 그지? 근데. 그러니까 서울에서는 다들 “집에 가자~” 하고 회군했는데 광주 시민분들은 고립되서 민주화항쟁을 했다고 하니까 좀 씁쓸하기도 하고 대단하네요. 배우 송강호씨 나오는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보면, 완전 감동이자나요. 송강호 아저씨가 서울 택시기사로 나오는데, 돈 벌려고 독일인 기자 태우고 광주에 갔다가 광주에서 사람들이 군인들한테 당하는거 보고 엄청 충격받고, 근데 그냥 도망치지 않고, 그 독일기자 아저씨랑 같이 광주에서 찍은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목숨 걸고 도와주는 이야기 말이에요.


아빠: 그래 아빠도 그거 들어봤지. 그거 실화라고 하더라. 이제는 그런 영화도 만들어지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 사실 이 사진은 아빠가 그런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찍은 사진은 아니고 우연히 찍게 되었어! 이것도 아주 재미난 이야기지.


딸: 뭔데요? 뭔데요?


아빠: 실은 그 날 현대자동차 홍보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차장님이 점심을 먹자고 해서 간거였지. 거기가 지금은 세브란스 빌딩인데, 그때는 동양고속빌딩이라고 했어. 그 빌딩 2층에 현대자동차 남대문 영업소가 있었거든. 밥 먹고 차장님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밖이 시끌시끌해서 내다보니 서울역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거야. 그때 카메라를 항상 메고 다니니까 자연스럽게 찍게된거야.


딸: 근데 아빠, 그 사진은 완전 위에서 내려다보는 항공샷 느낌인데, 드론도 없던 시절이잖아요?


아빠: 하하, 무슨 소리야. 그때는 드론커녕, 필름카메라 들고 다니던 시절인걸? 얼른 건물 비상계단 올라가서 찍은 거지.


딸: 와, 그럼 아빠는 데모 취재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점심 먹으러 갔다가 역사의 한가운데서 “찰칵!” 한 거네요? 완전 운명적인 사진작가의 삶…!


아빠: 그래! 운명이라면 운명이지. 내가 취재기자도 아닌데 그 시간에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기는 하구나. 그날은 워낙 긴장된 분위기라서, 다들 진지했어. 그리고 한 방에 모든 걸 담아야 하니까, 위치도 신경 쓰고 타이밍도 잘 맞춰야 했지. 사람들로 가득 찬 서울역 광장, 그게 네가 보고 있는 역사적인 사진이 되었네.


딸: 아빠, 그날 집에는 어떻게 들어갔어요? 버스도 다 막히고, 지하철도 끊기고, 완전 교통지옥 아니었어요?


아빠: 맞아. 서울역이 막히면 서울 시내가 다 막혀. 그날은 저녁까지 꼼짝 못하고 있다가, 겨우 버스 타고 집에 들어갔지. 밥도 못 먹고, 집에 오니까 이미 밤이었어. 그때는 그냥 집에 들어가는 것도 모험이었지


딸: 아빠, 그때 사진 찍으면서 “이게 나중에 역사가 되겠구나!” 이런 느낌 받으셨어요? 아니면 그냥 “오늘 점심값은 누가 내지?” 이런 생각만 했어요?


아빠: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그게 그렇게 큰 역사가 될 줄은 몰랐지. 그냥 그 순간을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한 장 한 장이 다 역사의 증거가 되는 거야. 데모 사진은 일부러 찍으러 간 적은 별로 없었고, 그날은 정말 우연히, 운명처럼 찍은 거지. 그런 반면에 아빠가 맘먹고 이건 꼭 남겨야겠다고 쫓아가서 찍은 사진도 있지.


딸: 그건 또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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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시청 이한열 열사 장례식 - 사진 박옥수

아빠: 1987년 7월 9일에 시청 앞에서 찍은 이한열 열사 장례식 사진이야.


딸: 80년과 87년 시간 차가 꽤 있는데요?


아빠: 그렇지? 그날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은 장례식 사진을 꼭 찍어야겠다’ 마음먹고 시청 앞으로 갔지. 근데 문제는 내가 기자도 아니고, 통행증도 없고, 딱히 신분증도 주민등록증 하나뿐이었어. 어디서 오셨어요? 하면 항상 “우리 집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지.


딸: 와, 아빠. 어디서 오셨어요? 하면 “집에서요!” 이거 완전 MZ 스타일인데요? 저도 다음에 어디서 왔냐고 하면 그렇게 대답해야겠어요. 근데 그날 시청 앞 건물에는 어떻게 들어갔어요? 경비 아저씨들 엄청 빡세게 지키셨을 것 같은데.


아빠: 맞아. 건물 코너에 경비들이 서 있었는데, 마침 젊은 사진기자들이 우르르 어떤 건물에 뛰어들어가더라고. 나도 얼른 쫓아 들어갔지. 카메라 하나만 딱 메고, 필름 두어 개 챙기고. 엘리베이터 타고 중간쯤에서 내렸어. 근데 거긴 복도가 아니라 바로 사무실이더라고. 사람들이 창가에 다 몰려서 구경하고 있었지. 나도 슬쩍 한쪽에 가서 창문 열고 딱 자리를 잡았지.


딸: 와, 아빠 완전 스파이 같아요. 분위기가 살벌했을거 같은데…


아빠: 그때는 시민들도 다들 뭔가 울컥하고, 결집된 분위기였지. 연세대학교에서부터 서울시청 앞까지 이어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 행사였다고 봐야 해. 이한열은 6월 민주항쟁 도중에 경찰이 쏜 최루찬에 맞아서 숨진 대학생이니 얼마나 불쌍하냐. 그래서 국민들이 엄청 분노하고 슬퍼하고…그날 장례식은 그냥 장례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민주화 운동이었으니까. 시민들이 시청 앞을 가득 메우고, 노제도 지내고, 행렬이 다 지나가도 해산을 안하고 다들 그자리에 있었어. 그리고 계속 시청을 향해서 “조기 게양하라!”고 외쳤지. 프라자 호텔에서는 바로 조기 내리더라고. 근데 시청에서는 안 내리니까, 시민들이 더 크게 외쳤지.


딸: 아빠, 그럼 사진 찍으면서 무슨 생각 들었어요? “이거 대박 사진이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아니면 “아, 오늘도 점심은 못 먹겠구나…” 이런 거였어요?


아빠: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그 순간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 내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도 아니고, 보도사진 기자도 아니었지만 그런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더라고. 그리고 그 때는 신문사도 몇 개 없었고, 사진 찍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 요즘 같으면 기자들이 백여명씩 몰려들텐데, 그땐 현장에 있었던 몇 명만 찍은 거지.


딸: 그렇죠 요즘 같으면 기자뿐이야? 온갖 유투버들도 찍고 난리도 아닐껄요? 근데 그때는 필름도 귀한 시절이라 막 찍지도 못했겠네요. 지금 같으면 백장찍고 한장 건지고 할텐데…


아빠: 맞아. 필름이 귀해서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찍었지. 한통이 36정이거든. 카메라에 든 필름 한통 주머니에 넣고 간 필름한통 그게 다야. 36장짜리 필름 두 통이면 72장, 그게 다였으니까. 그래서 더 집중해서 찍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사진 한 장 한 장이 그 시절의 분위기, 사람들의 표정, 그날의 함성을 다 담고 있었지.


딸: 와 그런 순간에 있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요. 이 한 장의 사진에 참 많은 이야기가 있네여.


아빠: 그 뿐인줄 아니? 아주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지. 그게, 나는 한 6~7층쯤에서 내렸나? 근데 거기가 내리니까 복도도 아니고 바로 사무실이었다고 했자나? 내 기억엔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들 바깥 구경하느라 바빴지. 나도 슬쩍 한쪽에 가서 창문 열고 찍고 있었던 거지. 행렬이 저쪽 서소문 쪽에서부터 들어오더라고. 충정로로 해서 시청 앞에서 노제 지내고, 롯데 앞으로 쭉 나가는 거지. 위에서 보면 행렬이 롯데 앞으로 지나가고, 멀리까지 이어지는 게 한눈에 들어왔어. 나는 그 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계속 찍었지.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 모를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 뒤통수가 싸늘해진거지.


딸: 딱 걸렸구나.


아빠: 돌아보니까 어떤 놈이 딱 와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거지. 다른 사람들도 다 나를 쳐다보는데 다 넥타이를 멘 사람들인데


딸: 아빠는 완전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이었겠네요


아빠: 그렇지 잠깐의 긴장을 깨고 저쪽 끝에서 한 부장정도 되는 분이 걸어와서 나한테 묻는거지. 또 시작되었지 ‘어디서 나오셨냐’고


딸: 어디서 나오긴요 ㅎㅎ ‘집에서요!’라고 하셨다면서요?


아빠: 아니지. 이번엔 내가 완전히 쫄아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명함을 내밀면서 내 소개를 했지. ‘충무로에서 토탈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사진가다.’ ‘사진을 찍으려고 내렸는데 보니깐 다들 구경하고 있어서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해서 급하게 사진을 찍었다.’ 사실 남의 사무실에 무단침입해서 찍은 거니까 미안하다고 했어. 이쪽도 설명을 들어보니깐 거기가 포항제철의 서울사무소의 재정본부더라고.


딸: 우왓. 대기업 자금부서에 함부로 침입했단 말이에요? 지금 같으면 요원들에게 끌려나갈듯요.


아빠: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어. 문제가 생기면 스튜디오로 연락을 달라고 하고 얼른 나왔지.


딸: 아, 아빠 완전 쿨하게 퇴장! 근데 그때도 다들 구경만 하고, 누구 하나 뭐라고 안 했다는 게 신기해요. 다들 그날은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나 봐요.


아빠: 그러게 그랬었을거야. 아무튼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내가 80년도 서울역회군을 우연히 사진을 찍게 되었고, 그때는 내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도 아니고, 그냥 현장에 있으니까 찍은 거야. 그게 바로 현장에 있다는 것의 힘이지. 우연히 있었기 때문에 찍게 된 거고, 그날 시청에서 이한열 장례식은 ‘시작과 끝을 나 스스로 마무리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부러 간 거야. 그러다 보니 이런 해프닝도 생기고, 그 사진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지.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그 사진들이 역사의 한 조각이 돼 있더라. 그리고 그 사진을 통해서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젊은 세대인 너처럼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역사는 그냥 기록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의 삶이고, 선택이고, 우연이야. 그걸 잊지 않는 게 진짜 역사를 배우는 거지.


딸: 아빠, 그날 사진이 그냥 사진이 아니라 진짜 역사의 한 장면이었네요. 저도 앞으로 어디 가든 “우리 집에서 왔어요!” 하면서, 순간을 기록해봐야겠어요. 아빠, 오늘도 레전드 썰 감사합니다!


아빠: 그래. 세월이 흘러도, 역사는 계속 이어지는 거니까. 네가 그 현장에 서서 또 다른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야.


딸: 아빠, 근데 배고파요! 오늘 저녁은… 제가 시킬께요. 역사적 순간에는 역시 치킨이죠!?!?!


아빠: 그래, 오늘은 네가 역사의 주인공이다. 치킨 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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