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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의 모(毛)난 고민

여자의 속 이야기 3화

by 김수다

그 털은 꼭 필요한 것일까.


어쩐지 조금 부끄럽지만 얼마 전부터 레이저 제모술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그 부위의 레이저제모술을 시술자로서 수백 번, 아니 수천번 해왔으면서도 막상 내가 시술을 받으려고 하니 머뭇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와 수영장을 자주 가게 되면서 미관상 보기 좋지 않고 신경이 쓰여 시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거기’를 보는 일을 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나이를 막론하고 제모를 한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체감한 것도 결심에 큰 몫을 했다.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창 몸의 변화에 예민해져 있던 12살 여름,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갔었다. 브라캡이 달린 수영복과 제법 곡선이 생긴 몸매가 괜히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오랜만에 물놀이가 즐거워 금세 기분이 좋아졌었다. 물놀이를 마치고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공용샤워실로 갔고 동생은 손가락으로 나의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엇, 언니 여기 털났네. 엄마 언니 여기 좀 봐봐."


샤워실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동생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댔다. 그 이후로 엄마와 동생과 매주 가던 공중목욕탕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나는 털이 많은 편이었다. 피부가 흰 편이라 더 도드라져 보였는데 가끔 친구들이 인중의 털을 보고 수염이냐며 남자냐고 놀릴 때도 있었다. 어렸을 적 아빠가 태어났을 때 털이 너무 많아서 원숭이인줄 알았다고 하실 정도였다. 미인은 털이 많은 거라며 발끈하며 되받아쳤지만 당시에는 큰 상처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반팔이나 반바지는 입지 않게 되었고 아빠 면도기로 몰래 면도를 하다가 상처가 나기도 했다. 나는 왜 이리 털이 많냐며 너무 보기 싫어서 속상하다는 말에, 엄마는 '괜찮아'라고만 대답했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유방의 발달이 시작되면 평균 6개월에서 1년 후 음모 발달이 시작된다. 물론, 개인차는 있다. 대음순에 소량의 얇고 긴 털이 자라기 시작하며 점차 범위가 넓어지고 꾸불꾸불한 털이 가득 메워지게 된다.


털이라는 것은 미적인 부분에서 원시적이고 거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별 거 아닌 줄 알았던 털 몇 가닥이 아이의 자존감과 자존심에 상처가 될 수 있다. 음모와 겨드랑이의 털을 성인의 상징으로 여기고 자랑거리로 삼는 아이들도 있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10살 이후의 아이들이 외모에 대한 불만이나 속상함을 이야기할 때는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한다. 비정상적으로 털이 많다면 의사의 진료가 필요할 수 있다. 아직 어리잖아, 학생이잖아, 어른되면 다 괜찮아져, 이런 대답보다 속상한 마음을 공감해 주고 아이의 신체 변화에 엄마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현을 해주는 게 좋다. 어른들도 끊임없이 예뻐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가. 사춘기 아이들에게 외모는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건강한 자아와 신체상 형성을 위해서 몸에 대한 긍정적인 관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 엄마도 너 나이 때에 팔다리털 때문에 창피해서 반바지를 못 입었어.”

“맞아, 음순에 털이 나기 시작하면 수영장 갈 때도 신경 쓰여.”


아이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면도기를 준비해 주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주거나 제모크림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이만 괜찮다면 레이저 제모도 좋은 선택이다. 실제로 10대 초반의 아이들이 집에서 몰래 음모 면도를 하다가 난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곪아 터진 상태로 어기적거리며 산부인과에 오는 경우들을 꽤 봤다.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엄마와 같이 온 아이들은 그나마 낫다. ‘산부인과’라는 막연한 거부감 때문에 망설이다가 속옷도 입지 못할 만큼 아파져서야 쭈뼛거리며 오는 아이들도 많다.




어느 날 성교육동화책을 보던 딸이 물었다.


"엄마, 어른이 되면 음순과 겨드랑이에 털이 난대. 엄마도 이렇게 변한 거야? 근데 엄마 겨드랑이에 털 없잖아.“

"아, 응 이거 없앤 거야.“

"그게 가능해?"

"털 없애는 거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나중에 털이 너무 싫으면 얘기해. 마법처럼 한 번에 없어지진 않지만 없앨 수 있어. 근데 털이 없으면 이상한 곳도 있잖아. 머리카락이나 눈썹처럼. 털이 그렇게 보기 싫은 건 아닌 거 같아.“


음모도 이유가 있다. 먼지와 세균으로부터 생식기를 보호하고 피부의 마찰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잘 크고 있다는, 어른이 되고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제모를 먼저 권유하는 경우도 있다. 반복적으로 외음부의 모낭염이 생기는 경우, 질염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그렇다. 분비물이나 생리혈이 음모에 묻은 채로 뒤엉키면 찝찝함과 냄새를 유발하고 그것이 외음부염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동료 선생님과 아이는 언제까지 예쁠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의 딸은 중학교 2학년으로 이제 엄마보다 훨씬 키도 크고 화장도 잘한단다. 얼마 전부터 음모가 나기 시작해 부끄러움이 많아졌다는데, 그래도 여전히 아가처럼 사랑스럽다고. 엄마 눈에는 딸의 음모마저도 귀여운 것이다.

마흔이 넘은 엄마도 여전히 털은 고민이다. 이제 몇 년 후면 딸과 함께 여자로서 같은 고민거리를 나누게 될 날이 오겠지. 이런 것도 딸 키우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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