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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빗 Oct 29. 2020

공격형 인간 vs 방어형 인간

사회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에게 ‘닳고 닳았다’는 표현을 쓰곤 하더라. 

사물이 아닌 사람에게 쓰기엔 적합하지 않은 말이지만.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파에 시달리고 이 사회에 신물이 나서 그 나름의 살아남는 법을 익힌 이들. 


그래서일까. 사람마다 생존 방식이 크게 두 부류로 양분된다. 


흐르는 ‘물’이 되거나, 타오르는 ‘불’이 되거나.      



공격적인 사람은 적극적이고, 방어적인 사람은 수동적이라고 많이들 착각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의 눈과 귀는 목소리 큰 사람을 향하기 때문이다. 번쩍 손 들며 ‘제가 하겠습니다’를 외치는 사람이 예뻐 보이고, ‘네가 잘못된 거고 내가 맞아’라고 똑 부러지게 바로잡는 사람 말이 맞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심하게 ‘그거 아닌데’ 하고 쭈뼛거리면 뭐하나. 누구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억울하면 다 함께 ‘불’이 되어야지 별 수 있나. 같이 화내고 아우성치고 확실하게 의견을 피력하면서.       


때론 공격성을 띈 사람의 기세에 눌려 방어적 태세를 취하는 사람도 있다. 일명 ‘내 인생이 제일 불쌍해’ 유형이다. SNS 포스팅을 보면 남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고, 크게 힘든 일 없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왜 내 인생만 꼬인 건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타인을 가해자 취급하는 건 못난 짓인 걸 알면서 궁시렁거리는 건 곧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일 거다.      


-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 한 마디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다들 한때는 착한 어린이였을 텐데. 공격 형과 방어 형 인간 모두 생긴 모양이 다를 뿐이지, '세파에 닳고 닳은'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같다. 차가운 세상에 맞서기 위해 자신만의 창과 방패를 든 것이다. 약자인 자신을 변호하고 궁지에 몰리기 전에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치열한 사투 같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 할머니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동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한다. 그녀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공무원들은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노인이라고 흉보지만, 영화를 통해 그녀가 지나온 삶을 쭈욱 보다 보면 그녀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일생을 약자로 살아왔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힘 있는 자에 맞서는 용기, 자신과 같은 약자들이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들을 향한 응원 등이 담긴 목소리였을 거다. 목소리 큰 사람 무식한 거라고 마냥 욕해서도 안 된다는 것.  


- ‘어느 쪽도 미워할 수 없다. 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한번은 어른들이 신입사원들 너무 괜찮다고 칭찬을 하는데, 그중 한 분이 불쑥 퉁명스럽게 꺼내시던 말씀. 


- ‘그 나이에 안 괜찮으면 어떡해, 어릴 땐 다 멀쩡하지.’ 


그 말이 왠지 슬펐다. 열정과 패기 넘치던 청춘들이 세상 풍파에 시달리면서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 ‘물’도 됐다가 ‘불’도 됐다가, 종국에는 ‘꼰대’ 혹은 ‘시대에 뒤쳐진 옛날 사람’ 취급을 받게 되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 다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건데 왜 그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건지. 그냥 ‘당신 탓이 아니라고’ 해주면 될 것을.      


힘껏 목소리를 내도된다. 

다만 불처럼 화낸다고 해결될 일도 없고,

피해의식을 갖는다 해서 측은지심을 가질 이도 없다. 

물불 가리지 말고 그저 있는 그 자리에서 충실하면 그만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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