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서울 변두리에 살았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싫고 무서웠던 것은 '심심함'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미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각각 창업하여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고 있었고, SF 영화의 전설인 '스타워즈'도 이미 개봉하여 화제가 되고 있었지만, 흑백 TV조차 흔치 않았던 1970년대 대한민국 서울 변두리 가정집에는 늘 놀 것도 볼 것도 딱히 없었다.
시골처럼 자연을 벗 삼아 뛰 놀 수 있는 곳도 아니었고 도회지처럼 흥미 있는 가게나 놀거리가 있지도 않았다. 도시도 시골도 아닌 어중간한 그 동네에서 그나마 할 거라곤 태권도장에 가서 애들과 발차기를 열심히 하거나 동네 공터에 나가서 공을 차던지 흙밭에 뒹굴기라도 해야 하루가 지나곤 했지만 하필 내가 살던 우리 집 골목에는 또래의 친한 친구조차도 없었다.
당시 관심이 가는 또래라고는 뒷 집에 살던 수연이라는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녀의 존재만 알 뿐 잠시 얼굴이 보인다 싶으면 늘 집에 금방 들어가 버려서 같이 어울릴 기회가 잘 없었는데, 어느 날 수연이 사촌 혜선이가 와서 그 집에 같이 살게 됐다. 말수가 적은 수연이와는 달리 외향적인 혜선이 덕에 드디어 7살 동갑내기 셋이서 어울리기 시작했고 나의 심심함은 겨우 옅어지는 듯했다.
어린 내 눈에도 우리 엄마보다 젊고 예쁜 수연이 엄마는 언뜻 봐도 다른 동네 아줌마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슬림한 옷차림에 머리도 길고 말투나 행동도 부드럽고 가녀렸다. 그랬던 수연이 엄마는 어느 날 밥을 잘 차려놓고 집으로 나를 초대해서 자신이 외출하는 동안 여자 애들과 놀면서 같이 집을 봐달라 부탁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날 밥상에서 두 여자아이가 서로 번갈아 가며 내 입에 김밥을 싸서 넣어주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됐다.
밥을 다 먹고 난 뒤에도 한참을 그 집에 머물다 나온 기억인데 남자애 하나와 여자애 둘이 집에서 뭘 하고 놀았을까 싶지만 의외로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다. 둘이 방에 들어가서 치마를 바꿔 입고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던가, 뭔가를 내 몸에 둘러놓고 모델처럼 워킹을 시키면서 까르르 좋아하거나, 내 머리에 삔도 꽂고 얼굴에 화장 비슷한 장난을 쳐 놓고는 자기들끼리 또 깔깔대며 좋아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여자애들의 놀이에 별 저항 없이 순순히 응한 내가 신기하기도 하지만, 더 놀라운 건어린 나이에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 내 안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뚜렷이 기억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커다란 쥐 한 마리가 쥐약을 먹고 그 집 마당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수연이 엄마를 포함한 세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쥐 잡기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나라에서 나눠준 쥐약을 놓아 여기저기 드러누운 쥐들이 자주 눈에 띄었었다. 쥐꼬리를 잘라오면 학교에서 연필을 나눠 줬다는 얘기도 있는데 나는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다. 흔한 쥐 따위가 뭐라며 7살 꼬마인 내가 짠 나타나서 해결을 했다. 마치 씩씩한 장정이나 된 듯 쥐꼬리를 잡아서 휙- 휴지통으로 가볍게 처리해 주고 으쓱했었다. 쥐에 대한 거부감이나 더러움도 떨쳐낼 만큼 그 집에 살던 여인들은 나에게 대단한 동기부여의 존재였다.
그녀들의 집에 놀러 가지 않아도, 약속을 하지 않아도 또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 집 다락에 기어 올라가서 조그만 창으로 수연이네 거실 발코니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두 집은 폭이 좁은 사도를 사이에 두고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동네 대부분을 차지하던 새마을 운동 당시에 지어진 비슷한 형태의 집이었다.
내가 소리쳐 불러 내지 않아도 두 여자 아이들이 어떻게 금방 알고 나타나곤 했다. 남자아이는 먼지가 가득한 박공지붕 밑 다락방 조그만 창으로 기어 올라가 여자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재잘 떠들고, 두 여자 아이는 거실 앞 좁은 발코니에서 방긋 올려다보며 웃고. 그땐 우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면 금방 날이 어두워지고, 다락 바로 아래 부엌에서 모든 대화를 들으며 저녁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나를 불러내리면 우리들의 만남은 아쉽게 깨지곤 했다.
그런 식으로 늘 훼방을 놓던 어머니의 방해는 초등학교 입학식 날 절정에 달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서 수건에 이름표를 달고 마치 제식 훈련을 하듯 한참을 서 있다 오는 길에 수연이를 만났다. 옆에 혜선이는 없었다. 수연이와 인사를 했던가? 그 애가 집 안으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어머니는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 집 딸들과 교류를 자제할 것을 권고했는데, 부모의 나이가 된 지금의 내가 다시 생각해 봐도 당시의 어머니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른들 만의 무슨 사정이 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간 어머니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면, 장래가 총망되는 장남에 대한 단도리 라기보다는 아마도 젊고 예쁜 이웃집 엄마와 그 딸에 대한 본능적인 질투심에 가깝지 않았을까 의심이 된다. 어쨌거나 그날 엄마의 묵직한 권고가 발단이 되어 이후 정말로 그녀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
당시 꼬마인 나에 대한 엄마의 지배력은 실로 막강해서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려도 무리는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더 큰 이유는 바로 사촌 혜선이가 그 집을 떠난 사실이었다. 입학식 날 늘 같이 있던 혜선이가 수연이 옆에 없었을 때도 눈치채지 못했다. 늘 먼저 다가오던 혜선이와는 달리 수연이는 내성적이고 새침했는데 그 아이는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지만 나와 단 둘이는 거의 어울려 본 기억이 없다.
아직 꼬마였을지라도 어느 날 간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린 혜선이의 공백이 작지 않았을 텐데. 유난히 심심한 어느 날엔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했을 텐데.. 너무 어려서 인지 성격 탓인지 별다른 노력을 해보지 못했다. 별 소용없을 거라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식 이후 혼자 집에 오는 것에 익숙해졌을 무렵, 어느 날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혜선이를 본 거 같았다. 아니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순간의 정적과 망설임 그리고 어이없는 선택.
왜 그땐 반가움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던 것일까? 아니면 그 아이 옆에 같이 장난을 치며 오던 다른 아이를 의식했던 것일까? 서로 어쩌지 못하고 그냥 각자 가던 길로 가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문득 이건 아니다 싶어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는데 이미 늦은 후회가 되어있었다. 처음 가보는 갈림길 낯선 골목에 주눅이 들어 결국 혜선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그 아이의 기억은 흐려져갔다.
(손) 편지 : 글씨그림 #167
그 후로 몇 년이 더 흘러 고학년이 된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서있었는데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 멍하니 빨간 벽돌 벽을 바라보다가 문득 혜선이는 그때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문 옆 초인종 버튼이 붙어 있던 벽면엔 당시 혜선이가 남긴 오래된 낙서가 있었는데 집에 드나들 때마다 본 것이라 지금까지 각인되어 있다. '얘 연 녕 이 따 가 뇰 자'. 이게 뭔 소리야? 하고 이해 못 했던 7살의 독해력이나,몰래 낙서를 하다가 들켜평소답지 않은 무안함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던 동갑내기 여자애의 문장력이나,모두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기엔 턱없이 부족한 탓에 그 담벼락에 남긴 의미는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게전달되었다.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그 눈 빛에 혜선이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얘 안녕. 나 떠나게 됐어. 너랑 같이 노는 게 너무 즐거웠는데 아쉽다.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