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한 여자 아이와 우연히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걸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아이가 귀여워서 말을 잘 받아줬겠지만, 그 아이는 제법 독특한 아이였나 보다. 처음 보는 덩치 큰 아저씨랑 얘기하는 게 무섭지도 않은지 겁도 없이 나란히 따라 걸었다. 어쩌면 아이들 보는 눈이 정확해서 당시 나는 지금과는 달리 꽤 부드럽고 선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는 지금 몇 살쯤 됐을까? 당시 나는 25살 정도, 그 아이는 10살도 되지 않았을 테니 15살 이상은 차이가 나겠다. 지금도 나보다 15살 어린 낯선 여자 사람들하고 대화를 길게 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땐 과연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기억도 상상도 잘 되지 않지만 중요한 건 당시 이 아이가 지금 자기 집을 맞게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어느새 우리 집은 거의 다가오는데 계속 따라 걷는 아이에게
`얘 넌 집이 어느 쪽이니?' 하고 물으니 예상했던 방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아니 그런데 너 왜 이길로 왔니?' 놀라서 내가 묻자 그 꼬마 아가씨가 했던 대답이
"이리로 가도 나와~"
어른에게 없는 것 - 여유 : 글씨그림 #8
'모든 길은 (집으로) 통한다.' 과거 로마인들이나 깨달았을 법한 놀라운 통찰력.
그것이 아이의 '여유'에 온 것인지 그저 천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빡빡한 일상에서 잠시라도 미소 짓게 해 주었던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