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을 결심했던 그 순간에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저출산 시대에도 불구하고 600년 만에 한번 돌아오는 '황금돼지띠'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많았다는데 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드디어 출가하여 신혼집에서 새색시와 매일 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예식을 무사히 치르고 몇 주나 지났을까? 이제 한 시름 놓아도 될까 싶던 어느 날 아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순간 멍 해졌다. 아이가 생길 수 있는 걸 마치 몰랐다는 듯이. 아마도 무의식 중에 아빠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금방 아빠가 돼? 하며 하늘이 내게 그런 기회를 순순히 줄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혼식 한 달 전부터 아내가 먹었던 보약이 그런 거였나? 가만 보니 나만 빼고 아내를 포함하여 양가 부모 모두 결혼 후 아이의 탄생이 바로 이어지길 기대했던 것이 분명했다. 나 역시 아이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외감은 접어두고 같이 기뻐하기로 했다. 아니 정말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라니. 내가 아빠가 되다니. 이젠 정말 외로울 일이 없겠구나!
아이가 생겼다는 건 아내의 뱃속에 미래의 내 아들이나 딸이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초음파 사진의 콩알만 한 것이 나중에 아기가 될 거라고 했다. 딸? 딸! 아 그 솜뭉치처럼 포근하고 가벼운, 핑크 빛 꽃잎에 쌓여 하늘이 내려주신 듯한 천사 같은 아기. 아내를 꼭 닮은 예쁜 딸이 내게 오려나 보다. 결혼으로 맞이한 아내에 이어 '원 플러스 원'으로 따라오게 될 딸아이까지 떠올리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척박했던 내 인생을 한꺼번에 보상받듯이 내게 딸이라니! 그러나 그 후로 아이를 둘이나 더 낳아도 아들만 나왔다. 내 인생에 딸은 없었다.
나는 남동생과 둘이 자랐다. 청소년기를 보낸 80년대는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민주화의 열기로 거리가 늘 뜨거웠지만 서울 변두리 학교를 다니던 우리 형제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별 큰일 없이 컸다. 무심한 아버지와 고집 센 어머니 밑에서 웬만한 불만은 샤우팅으로 해소하는 사자후를 익히고 방문은 부서져라 닫고 마루를 구르며 씩씩하게 사춘기를 보냈다.
대중목욕탕 로션 향과 버무려진 담배 냄새에 아버지의 출현을 감지하고간소한 어머니의 화장대는 이 집에도 여성도 거취하고 있다는 단서일 뿐이었다. 집에 꽃병 비슷한 것은 있어도 꽃이 놓여있던 기억은 잘 없고 생일 선물은커녕 케이크에 초를 꽂고 가족끼리 오붓하게 생일상을 차린 기억도 없다.(생각해보니 반 아이들을 왕창 불러 닭고기 파티를 한적은 있다.) 생일은 평소에도 자주 먹던 미역국을 한번 더 먹는 날이었을 뿐. 서로 사랑한다거나 소중하다거나 하는 마음을 잔잔하게 주고받는 기억도 거의 없다.
나중에 '딸들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지만, 당시엔 아빠가 예뻐하고 엄마에게 친구 같은 여동생이나 누나만 있어도 집안이 더 화목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응팔(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는 언니와 생일이 가까워서 받는 서러움에 목놓아 울었지만 반지하 집에 살면서도생일마다 케이크의 촛불을 밝히는구성원들의 온기가 나는 부러웠다.
여하간 그런 무미건조한 집안이 난 늘 별로 였는데, 남아 선호 세대인 부모님은 아들만 둘을 둔 것에 매우 만족하셨다. 그러나 나는 늘 여자 형제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특히 누나를 둔 친구를 많이 부러워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몰래 들어가 봤던 누나의 방은 바로 나오기 싫은 좋은 냄새가 나는 포근한 장소였다.
5살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살던 우리 집은 작은 교회를 마주 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에게는 내 또래의 막내아들과 그 위로 딸이 둘 더 있었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그 집 막내아들은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야무졌다. 같이 놀다가 다툼이 생기면 그 집 두 누나가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서 나를 궁지에 몰곤 했다. 누나들이라 잘 때리진 않았지만 편파적이고 불공정함에 억울해서 울며 집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것이 속상했던 어머니는 나를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사내놈이 툭하면 운다고 매를 드셨다. 이럴 수가!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어린이의 서러운 기분을 아시는지. 그때 비뚤어진 나는 두고두고 어른이 돼서도 틈만 나면 그 사건을 되뇌었는데 어머니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다.
가톨릭 신도였던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당에 다녔다. 주일마다 미사 보는 것은 지루했지만 성당에서 하는 다양한 활동은 재미있는 게 많았다. 여름방학에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성경학교 캠프에 갔는데, 야외 활동 시간에 우연히도 성당에서 제일 예쁜 고등학생 누나와 시골길을 나란히 걷게 됐다. 수줍게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어두컴컴한 밤길이었지만 누나의 하얀 블라우스와 운동화는 달빛을 받아 빛이 났고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도 빛이 났다. 그날 이후 일요일마다 누나를 마주치길 기대하며 성당에 열심히 다녔는데, 어느 날 성당에서 잘생기고 야구도 잘하는 형과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그다음부터는 마주쳐도 인사를 못했다. 실망이란 단어가 어울릴까? 그 해 성탄제에서 익살스러운 뮤지컬 연기로 더 인기를 끌던 그 형이 난 뭔가를 숨기고 있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학시절까지도 남달랐던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 비해 나는 참 숫기 없는 남자애였다. (지금의 반만 있었더라면..) 좋아하던 음악을 할 수 있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는데 연합동아리라 여대생도 많아서 분위기가 좋았다. 신입생 환영 엠티를 갔는데 다음 날 아침 전날 술을 잔뜩 마시고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 비교적 멀쩡하게 있던 나를 한 선배 누나가 따로 불러냈다. 대성리 가는 기차를 탔을 때부터 눈길이 가던 청바지가 잘 어울리던 누나였다. '잠시 걸을래?' 그 누나가 매점에서 하드를 하나 사줄 때까지도 나는 괜히 눈도 잘 못 마주쳤다. 나 스스로 분명히 쪽지에 '맛있는 거 사 주세요'라고 적어 냈으면서도 그녀가 내 마니또 쪽지를 뽑았을 거란 상상도 못 했다. 매점에서 숙소로 돌아와서야 누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 얘길 하며 착각의 늪에 빠졌던 나를 엄청 놀렸다.
누이 : 글씨그림 #41
동갑이지만 훨씬 성숙했던 누나 같던 동급생들에 대한 기억도 있다. 어려서부터 늘 반에서 키가 제일 큰 편이어서 키 순서대로 앉다 보면 맨 뒷자리에 비슷하게 키가 큰 사내아이와 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여자 짝이었는데, 그 반에는 여자애들 숫자가 더 많았는지 내 앞자리엔 여자애들끼리 둘이 앉아있었다. 내 짝 포함 세 여자애들은 키도 크고 성격도 좋아서 나랑 금방 친해졌는데 앞에 앉은 두 여자 아이들이 자주 뒤돌아 앉아 넷이 같이 노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짝하고 무슨 장난을 치다가 손에 뭔가 물컹하고 부드러운 것을 느꼈다. 어?... 뭐지 하고 말릴 틈도 없이 다시 손을 댔는데 놀랍게도 엄마의젖가슴 비슷한 것이 내 짝에게도 있는 거 같았다. 호기심이 충족이 안되어 다시 만져 보려고 했더니 그 아이가 팔로 가리며 거부했다. '아니 딱 한 번만~' 엄마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때 '희호야~ 그러는 거 아니야!' 나지막하고 엄중한 경고가 앞에서 들려왔다. 앞자리 두 여자애들이 돌아보고 있었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갑자기 멀어진 느낌? 셋다 어른이 되고 나만 개구쟁이로 전락한 느낌? 다른 장난이라면 그 정도에 물러설 내가 아닌데 그땐 뭔가 다른 기운을 느끼고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그리고 둘 중에 더 어른스럽던 친구가 앞으로 차차 벌어질 여자 동급생들의 몸의 변화와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조금 얘길 해줬던 거 같다. 그러니 놀라지도 말고 놀리지도 말라는 참된 교육이 아니었을까? 얼마 후에 내 짝은 브레이지어를 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누나 같던 동기들의 가르침을 난 그 이후로명심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