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 푼 하는 것도 아닌 자동차를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리 집은 부자도 아니었고 사치를 하는 부모님도 아니었지만 차를 선뜻 사주시겠다는 아버지의 제안에 나조차도 의아해했었다.
분당 신도시 건설이 채 마무리도 안된 93년도 말에 서울에서 분당으로 이사를 갔는데 나는 어려워진 통학 때문에 하숙이나 자취를 고려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차를 하나 사 줄 테니 타고 다니는 게 어떠냐고 하시기에 냉큼 수락했다. 단 기름값은 아르바이트로 해결하는 조건이었다.
차 기름 값을 대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두 번 학생의 집으로 방문해서 한 시간 반 정도 수업을 하고 월 30만 원을 받았다. 당시 기름 값은 리터당 400원대 였는데 한 달 내내 맘 놓고 몰고 다녀도 기름값과 용돈을 감당하기 충분한 돈이었다.
몇 년 전에 요즘 대학생들이 과외를 하면 얼마나 받을까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비슷한 조건으로 받는 과외 수업료가 내가 과외를 하던 20년 전과 거의 비슷해서 놀랐다. 그 사이 집 값은 4 배가 오르고 대학 등록금은 3배가 오르고 자동차 값은 2배가 올랐는데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벌 수 있는 돈은 거의 그대로라니.. 뭔가 잘못됐다.
교통이 너무 불편하니 집에 차가 하나 더 있는 것이 두루두루 좋겠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큰아들에게 시간차를 두고 내려진 포상이었을 수도 있고, 또 한 가지 짐작하자면 아버지 당신께서 어려서부터 차를 꽤나 좋아하던 분이라 자신의 아들에게 그랬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그 옛날에 할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차가 집에 트럭과 지프차 이렇게 두대나 있었다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
90년대에도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자기 차를 몰고 다니며 폼내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꼭 외제차가 아니어도 당시 스포츠카를 표방한 '스쿠프'라는 국산차는 쿠페형의 날렵한 디자인으로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독일 아우토반에서 포르셰와 마치 대등한 경쟁을 펼친듯한 광고로 인기를 끌던 '엘란트라'도 처음으로 차체에 곡선을 도입한 세련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태리에서 디자인을 받아온 '에스페로'는 최신예 전투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당시 '야타족'이란 말도 있었는데 좋은 차를 몰고 가다가 지나가는 예쁜 처자들에게 "야! 타!" 그러면 정말 그 차에 탄다는 믿기 힘든(당시에는) 이야기들도 횡횡하던 시절이다
PRIDE - 쫀심이 : 글씨그림 #188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내게 어떤 차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주저 없이 '프라이드'를 사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살짝 의외라는 반응이셨다. 이 얘길 하면 다들 왜 그랬냐고 묻는데, 나도 엘란트라 같은 세단이 세련되어 보이는 건 알았지만 (다음 차는 결국 엘란트라였다.)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는 마음도 있었고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난 당시 국민차라고 불리던 '티코' 다음으로 경제적이던 그 차가 좋아 보였다. 디자인도 실용적이고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다.
또 한 가지 의외라고 할만한 것은 오토메틱 (당시 꽤 비싼 옵션이었다.)을 마다하고 굳이 수동기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조수석에 앉아 흥미롭게 바라보던 기어봉(당시 스틱이라고 불렀다.)을 능숙하게 조작하는 것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대신 한 손 핸들링이 수월하도록 프라이드에는 좀처럼 달지 않는 파워핸들을 달았다.
큰 키에도 나는 그 조그만 자동차에 쏙 들어가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했다. 건축과 학부생으로 당시 학교에서 밤샘 작업이 많았는데 과제를 하다가 잠시 눈을 붙일 때면 나는 꼭 그 작은 차에 와서 눕곤 했다. 좁고 불편한 시트도 젊음 앞에선 불평이 못됐다. 90년대 초 학교에 아버지 차 혹은 어머니 차를 몰고 나타나는 친구들은 가끔 있었어도 온전히 자신의 자가용으로 통학을 하는 사람은 동기 중에 거의 유일하기도 했다.
그 차의 혜택은 함께 했던 친구 후배들에게도 고루 닿았었다. 대학시절 전공 보다도 더 열심했던 음악 동아리 공연 연습을 밤늦게 까지 하고 터벅터벅 집에 가는 길, 눈이 맞아 갑자기 편의점 뒤풀이라도 하게 되면 늘 지하철 막차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뛰곤 했다. 그러다 가끔씩 망연자실 막차를 놓쳐 피 같은 용돈을 택시비로 날리거나, 최악엔 노숙을 했던 경험도 있는데, 내게 차가 생긴 이후로는 막차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시간의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동차를 갖게 된 청춘은 마치 고가의 아이템을 장착한 게임 캐릭터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밤 12시에도 뜻만 맞으면 뒤풀이가 장소가 왕십리에서 경포대 앞바다로 바뀌기도 하고 인천 월미도가 되기도 했다. 자정이 지난 시각 집에 모두 데려다준다며 친구, 선후배를 차에 가득 태우고 (7명까지 타봤다) 좋아하는 김현철이나 조규찬의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면서 서울 곳곳을 누비고 다녀도 당시엔 하나도 힘들지 않았었다. 개중에는 은근히 좋아하던 여자 후배도 한 명쯤 있었을 법 한데 그러나 '작업용'으로는 거리가 먼 '프라이드'여서인지 차 안에서 벌어지는 그 흔한 로맨스 장면 하나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사실 한 여고생과의 추억이 있다. 다름 아닌 그 차의 기름값을 벌기 위해 했던 과외 아르바이트,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만났던 제자와의 추억이다.
90년대에는 마침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거리의 최루탄 가스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대학생들은 군입대, 등록금 마련, 취업 등의 미래에 대한 부담으로 만만치 않게 '아픈'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위 어떤 친구들도 청춘의 한낮을 축축하고 어둡게 보내진 않았는데 정작 나는 그들과는 별개로 떨어져 나온 낱알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신입생 시절 몇 차례 하고 그만두었던 과외 아르바이트를 대학교 4학년에 다시 시작하는 건 정말 내키지 않았다. 과외수업을 받는 학생의 집은 분당 신도시 우리 집에서 몇 정거장 안 떨어져 있는 같은 아파트촌이었는데 차 기름값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찾아가서 그 집의 초인종을 최초로 누를때의 부담감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런데 벨이 울리고 문이 열려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아르바이트는 설렘과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한 번도 구경한 적 없는 촉촉한 토양으로 착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번 언급했듯이) 건조한 우리 집 환경에 비해 너무 다른 분위기. 젊은 어머니와 여고생이 살고 있는 그 집은 모든것이 차분하고 단정했다. 좋은 향이 났다.
뭐가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대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제대로 연애한 번 못했던 상황이었고, 내 안에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결핍이 존재했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여동생처럼 늘 밝고 잘 따라주는 제자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과외가 차라리 즐거웠다. 일주일에 두 번 밖에 못 만나는 게 아쉬웠다. 그 아이는 이전엔 서울대 학생에게 과외를 받았었는데 수업시간에 옆에서 담배를 피워댔었다며 그에 비해 내가 얼마나 매너가 좋고 훌륭한지 부추기며 쿵 작을 잘 맞춰줬다.
아련한 기억이 몇 장면 있다. 나는 대학생이고 그 애는 교복 입은 고등학생이었지만 상대에게 호기심이 있던 건 그 아이 혼자만은 아니었다. 함께했던 반년의 시간이 금방 흐르고 나는 졸업을 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과외도 그만두었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이제 돈도 벌고 다 좋았는데 문제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뒤로도 나는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2년이나 더 남은 그 아이를 계속 볼 명분이 없던 나는 몇 달 동안 마치 금단현상을 겪는 듯 힘들었다.
그리움이 목까지 차올랐던 어느 일요일 나는 그 애를 다시 만났다. 아주 오랜만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그 아이의 실루엣과 너무도 반가워하던 그 표정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DSLR 카메라 사진처럼 생생하다. 둘이 같이 뭔가를 사 먹고 노래방에 가서 실컷 노래도 부르고, 그래 봐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회사원이 된 아저씨가 여고생과 또 뭘 하고 놀 수가 있었을까?
나는 내차를 몰아보겠다는 여고생의 성화에 못 이겨 장소를 찾다가 결국 동네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아이에게 운전대를 넘긴 순간부터 옆 자리에서 난 계속 비명을 질렀고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 골대를 아슬아슬 피해 다녔다. 위험천만함에도 나는 아마도 아직 미성년이고 모든 것에 제약이 많던 그 아이에게 잠시나마 일탈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학교 운동장에서 내 혼을 한참 빼놓은 아이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봐야 한다고 했다. 두 집안이 모두 가톨릭이었는데 사실 나는 성당에 잘 안간 지 한참 됐었지만 그날은 같이 갔다. 아침에 나올 때부터 꼼꼼히 챙겨 나온 미사보를 쓰고 기도를 하는 모습이 꼭 면사포를 쓴 어린 신부 같았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더니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함께했던 긴 하루가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오는 시간이 돼서야나는 아무 걱정 없이 놀던 아이를 차에 태워 집에 잘 데려다주었다. 어디서 왔는지 내 머리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잠시 왔다가 날아갔다.
그 작은 차는 내 인생에 있어 큰 선물이었다. 부족한 것도 어려울 것도 없던 젊은 날에 비해 다사다난한 중년을 지나오며 가끔 아버지가 싫어질 때마다 그 차를 떠올리며, 그래도 당신의 월급을 쪼개 아직 학생이었던 아들에게 넘치는 선물을 해주셨던 분이었다는 생각을 하면 노여운 마음이 가라앉기도 했다. 가장 고마운 기억이 겨우 물질적인 것 이냐는 아버지의 실망에도 결국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
나의 첫차 PRIDE는 만난 지 겨우 5년 뒤 찾아온 IMF의 궁핍함에 단돈 150만 원에 팔아버려야 했다. 그 후로 세 번에 걸쳐 다른 차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차는 점점 더 비싸지고 더 커졌지만, 그 작은 '프라이드' 만큼 내게 설렘과 기쁨을 줄 수 있던 차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옵션들이 가득했던 내 인생에 있어 특별한 첫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