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귀도 어두우신 아버지가하루가 지나서야 나의 톡을 발견하고 보낸 답장엔 언제나처럼 'ㅅ'이 하나 빠져 있다.
천지인 자판으로 띄엄띄엄맞춤법도 틀리게 보내시는그 답장은 이유를 불문하고 늘 내게 안도감을 준다. 성년을 지나 이제 무르익은 중년이 된 나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어떤의미이길래..불편함과 불친절함으로 평생 가깝지만 가까이하기 힘든 그러나 '그러든지 말든지' 할 수 없는 연결될 수밖에 없는 혈육이라는 존재.
결국 파킨슨 중증환자인 어머니를 돌보며 함께 지내기를 포기하셨을 때 나는 그 한계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였지만 결정에 대한 모든 책망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고목 같은 가장의 모습이 커 보이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정성으로 키워 놓은 아들인 나는그저 미약한 존재이기만 했다.
온 가족이 어머니의 죽음의 경계에서 보내야 했던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나는부쩍 잦은 접촉 사고를 일으키는 아버지로부터 차 키를 뺏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당신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안전의 이유로..30년 전 대학생이었던 내게차키를 내주셨던 아버지 마음 역시 불안하셨을 것이다. 나는 내 아들들에게 아버지만큼 할 수 없을 거 같다.
동창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매일 아침마다 뉴스 Summary를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70여 명이 모여 있는 방인데도 이런 호의에 별 반응들이 없다. 뭐 그렇지 항상.. 그 뉴스들이 맘에 안 들거나 유용함을 못 느껴서 일 수도 있지만 특히 우리(한국인)는 늘 그런 식이다.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 상황에선 모른 척하지는 않지만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는누구도 선뜻 한마디 하기가 참 어려운 그런 Super shy 한 민족.
나라고 뭐 그렇게 다를까? 나는 아주 소심하게 그 친구의 글에 밑에 엄지따봉을 달아준다.(이 기능 너무 좋다.) 정보도 유용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내 주는 성의도 있는 거니까.
그러다 어느 날 그걸 그대로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단톡방으로 보냈는데 바쁜 동생이 읽기 좋다고 부탁해서 나도 매일 포워딩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도 가족 단톡방으로 전달되는 뉴스들을좋아하신 다는 걸 어느 날 알게 됐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안 읽는 동생이 뉴스를 읽는다는 사실에 특히.ㅎ
그러다 보니 대화가 한동안 끊기기 십상인 우리 부자들 사이에 이 뉴스 기사 전송이 유일한 소통인 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기사를 단톡방에 처음 전송했던 친구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 방이 죽어있는 방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였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친구가 전하는 뉴스에 따봉을 꼼꼼히 달아주었다. 그 기사를 전달받은 우리 가족은 나에겐 따봉 같은 건 안 주어도 분명 우리는 서로를 매일 한 번은 떠올리고 생각한 게 맞아요. 하며 작은 위안을 삼는다.
사실 매일 빠지지 않고 한다 해도 나는 그 성실함에 대해 그리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진 않다. 매일 톡에 올라오는 빨간 단추가 잊을 수 없게 해주는 것이니.. 어쩌면 그 친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대가가 있던 없던 어느 누군가의 노력이 시초가 되어그렇게 서로 큰 부담 없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뉴스는 매우 중립적인 시선으로 추린 것이라고 했다.정치적이거나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우리는 왜 서로에게 서로가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것에 안도하고 만족하는 것일까?
여전히 세상에 염려가 많으신 아버지를 볼 때마다 노후의 삶보다는 죽음을 먼저 떠올렸던 아들의 시선이 경솔했다는 걸 느낀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나의 가족들이 오늘도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