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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나무의 미혜
Jul 06. 2022
감사하게도 도서관에서 에세이 수업을 들었던 분들과 모임으로 쭉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우리의 모임 방식은 매주 한 명씩 번갈아 가며 쓸 글의 주제를 정하는데 이번에는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던 주제여서 잠시 벙했었다. 어찌어찌 약속한 날까지 써야 할 텐데 하루하루가 지나는데도 내게 '오래된 물건'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집안 곳곳은 육아용품으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좁은 집 가득 아이들 물건으로 쌓였고 자리를 내주려 내 물건부터 버렸다. 오래된 물건을 치운 자리에는 새로운 물건이 들어왔다. 매년 아이들이 크면서 달라지는 관심사의 책과 계절별로 한 치수 큰 옷 등을 사기 위해 머릿속은 늘 분주했다. 아이들의 앞일만 생각하는 오늘 때문에 과거의 나는 지워졌다. '오래된 물건이 무엇이 있으려나?' 이제는 아이들 물건으로 가득 차서 내 책상과 화장대도 없는 집안을 둘러보며 글을 쓰려 생경해진 오래된 물건을 찾아봤다.
가족의 옷으로 빼곡한 방 한구석에 오래된 일기장을 담은 박스가 있었다. 꺼내 보기에는 부끄럽지만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이사 왔을 때 보이지 않는 옷방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래도 기왕 이렇게 찾아냈으니 꺼내 볼 만도 한데 오래된 상자 위에 켜켜이 쌓인 옷가지 때문에 엄두를 못 내겠다. 쓸 계획이 많아서 지난 일기를 넘겨볼 시간도 없고…. (핑계다.)
'지금 너의 자리는 거기인 것 같아.' 섭섭하려나? 없으면 못 살 것처럼 항상 가방에 지니고 다니며 감정을 쏟아내더니 이제는 오래된 물건이라고 한쪽 구석에 처넣었다며 미워하려나? 언젠가 어떤 이유로 끄집어낼 추억이겠지만 아직은 시뻘건 선으로 갈겨댄 과거의 나를 마주 볼 자신이 없다. 뭐 여하튼 그렇고 그런 내 이야기 보다 이 주제를 정하신 분의 이야기와 다른 분들의 오래된 물건이 더 궁금하다.
이번에도 글을 쓰며 역시 내 생각은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모임에서도 느꼈지만 나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는 게 좋다. 이번에는 내게 없어서 몰랐던 오래된 물건을 살펴보며 나도 모르던 나를 만나게 되어 머릿속이 시원했다. 다음에는 어떤 주제를 생각하며 쓸지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주제에 다른 분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이어질 다음 모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