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지루하리만큼 성실한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을 걷고 싶다. 매일 같은 탁자 위에 매끼 마주 보는 반찬이 아닌 언젠가 TV에서 봤던 새로운 음식을 먹고 싶다. 여행지에서만큼은 다음 일정에 쫓겨 다급하게 치우고 싶지 않다. 오래도록 차려진 상에 마음 편하게 앉아 다양한 색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다. 그렇게 그곳의 바람을 내 안 깊숙이 담아 그와 같은 계절이 불어오는 날마다 공기의 기억을 꺼낼 것이다. 찬찬히 걸으며 온몸의 감각으로 새겼던 공간의 시간 속을 걸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날이 모든 날씨를 걸어야지. 맑은 날에는 강렬한 태양이 되어 덤벼들고 흐린 날에는 물기 가득 머금어 채도 낮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야지. 비가 오면 작은 어항 같은 세계로 참방참방 뛰어들어 흠뻑 젖어 들어야지. 그리하여 여행을 일상처럼 머물다 진짜 일상으로 돌아오면 잠시라도 여행처럼 살아갈 힘을 얻을 터이다. 그렇게 낯섦의 힘으로 잠들어가는 일상을 깨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콜록콜록 둘째 아이의 기침이 나아지기 무섭게 큰아이가 기침을 시작했다. 워낙 건강한 아이라 금세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2주가 지나는데도 약 봉투에 항생제는 빠지지 않았다. 말소리마다 기침이 터져 구역질하던 아이는 "언제 끝나!"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스치는 손길에도 예민해져 눈을 흘기며 밤잠을 설치던 아이를 남편과 나는 그저 달 보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약 한 달이 넘던 우리의 기나긴 여름 방학은 풀벌레와 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기침 소리로 달력의 숫자를 빨갛게 내리그었다. 그래도 아이들이라 그런지 몸이 좀 괜찮아지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아니, 내가 집안에서 벗어나고팠다. 아픈 냄새로 지끈거리는 일상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사람들 시선에 기침 한번 시원하게 뱉어내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었지만, 그냥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쪽 섬 우리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섬 안의 숲속을 걸으면 한여름의 싱그러운 초록 내가 묻어 마치 아이들도 생기 가득한 풀잎처럼 느껴졌다.
올해 여름의 그토록 지리멸렬한 기침이 잦아들자 어느새 가을이다. 여름방학 전에는 아이들과 어디로든 조금 멀리 떠나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수시로 드나드는 동네 병원과 약국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지치기는 했지만…) 이제 아이들은 병원 의자에 혼자 앉아 의젓하게 진료받을 정도로 컸고 그 누구보다 지친 엄마 마음을 이해하며 위로해주는 고마운 친구가 되었다. 이토록 서로가 절절할 때 더 꼭 붙어 재밌게 놀고 싶다. 남편 말대로 산과 바다가 있는 동네 나들이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아이들과 생소한 공간을 함께 익어가는 추억으로 만들고 싶다. 지난날 내가 경험하여 다시 꿈꾸는 여행을 아이들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다. 물론 나와는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겠지만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미련스러운 엄마와는 다르게 꿈꾸는 모습으로 훨훨 날아가기를 바란다.
자주 아픈 아이들과 집돌이 남편 그리고 걱정 많은 내가 당최 언제 섬 밖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여행을 꿈꾸고 있다. 언젠가 우리의 일상 같은 여행을 이렇게 글로 기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