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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 큰 나무의 미혜 Oct 14. 2022

네가 있어서 내가 살아

남편의 말

 


 아이들이 잠든 까만 밤. 뜬금없이 하루의 고단함을 풀어놓듯 나지막이 말하는 남편을 볼 때면 나는 참 반갑다. 지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가만히 눈을 맞추며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소년의 별을 찾아본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낮은음으로 웅웅-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내 높은음의 추임새를 적당히 넣어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을 연주한다. 워낙 말이 귀한 사람인지라 굳은 마음이 흘러내리면 우리를 감싸는 공간의 온도가 따스한 봄처럼 느껴져 장밋빛으로 변한다. 한때는 같은 일을 했었고 이만큼 아이들을 키웠더니 이제 남편의 어깨가 얼마나 굳을지 조금씩 보인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내가 함께할게요.'라는 생각을 전하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어디를 보는지 몰랐던 시선이 내게로 왔다.


 "네가 있어서 내가 살아."


 마주한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흘렀다. 남편은 고맙고 미안하다는 표현에도 인색한 사람이라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이 손가락 끝으로 찌리릭- 전류를 타고 심장까지 진동했다. 이 말을 들으려 지금껏 애쓴 걸까? 그동안 혹한 바람에 아렸던 우리의 겨울이 정말 모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 편의 영화처럼 14년의 연애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대로 안아 도닥도닥 등을 두드려줬다. 당장 상황은 나아지지 않겠지만 잠시 살아갈 힘은 얻겠지. 매일 방전된 오늘을 서로 충전하기 위해 우리는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된 것은 아닐까? 내일이면 또 같을 힘듦으로 등을 두드리던 손끝을 앙칼지게 세워 서로를 할퀼지도 모르지만 늘 그렇게 다시 웃으며 사랑할거야. 당신은 내 앞으로의 모든 오늘을 함께 겪고 싶은 사람이니깐.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글보다 매일 욕하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쓰기가 더욱 힘겨웠다. 그런데도 꼭 남기고 싶었다. 이토록 지리멸렬이 헤어질 듯 싸웠더라도 핑크빛 마음을 나눴던 시간의 한 조각이 있었음을 박제해두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을의 서늘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같은 글을 자신을 위해서도 적고 싶었다. 오랜만에 오롯이 하루를 글로 남편을 그렸더니 얄궂은 취미처럼 노부부가 된 우리를 상상하게 된다. 아마 오래된 친구처럼 여전히 서로에게 무뚝뚝하겠지만 구부러진 몸과 마음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고 있을 것이다. 말없이 각자의 일을 하여도 알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 그냥 같을 오늘처럼 내가 있어서 그가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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