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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Sep 28. 2018

합격의 조건: 미혼이거나 슈퍼우먼이거나


  굳이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아도 ‘나의 정년은 빨리 오겠구나’ 싶었다.


  “결혼했어요?”

  “아이는요?”

  “임신 계획은 있어요?”


  세 번째였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일이.


  “했습니다.” 

  “없습니다.”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저렇게 대답하면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좀 근엄해졌다. 이런 타이밍에 이런 말을 하는 면접관도 꼭 있다.


  “우린 오래 같이 일할 사람을 뽑고 싶어요.”     




  처음에는 억울했다. 사회는 결혼을 부추기는데, 회사는 기혼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누군가를 붙들고 따지고 싶은 데 정확히 누구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어 답답했다.

나는 지인의 추천으로 2번, 헤드헌터의 추천으로 1번, 총 3번의 면 접 후 이직을 포기했다. 기혼자니까. 임신을 계획 중이니까. 거짓말하기 싫으니까. 그래서 지금 다니는 회사에 눌러 앉기로 했다. 이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일단은 이렇게 있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능력을 만들어봐.” 


  누군가는 이렇게 조언했다. 그럴수록 더 죽을힘을 다하라고. 나는 내 직업이 좋다. 그리고 일하는 것도 좋다. 그래서 일할 때 최선을 다하고, 늘 노력한다. 업무 스킬을 위한 공부와 활동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죽을힘을 다하면 진짜 죽는 건 아닐까? 이런 경우 더 절실히 필요한 건 능력이 아니라 포기가 아닐까?

이런 이야기가 그저 나약한 핑계일 뿐이라고, 보란 듯이 증명하는 선배도 있었다. 그녀는 결혼 후 임신 막달까지 열심히 일했다. 출산 휴가 후에는 바로 복직해서 활기차게 일을 시작했다. 게다가 회식과 야근도 마다치 않았다. 퇴근 후에는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했다. 그 선배는 남 자 동료들보다 승진이 빨랐고 여전히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그래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 슈.퍼.우.먼.


  선배는 사람들의 칭송과 칭찬에 멋쩍은 미소를 보내며 말한다. 후배와 미혼인 친구들에게 이렇게.


  “인생에서 결혼이 꼭 필요한 건 아닌 것 같다.”     




  나도 ‘슈퍼우먼’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내가 사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 그 모든 순간에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선택한 건 나니까. 일과 가정, 그리고 내 자존심까지 다 지켜내고 싶었다. 임신과 육아로 퇴사한 상사와 선배를 만날 때면, 그들의 편안한 미소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라고. 육아로 회사를 그만둔 후 본인이 하던 일로 재취업한 선배들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금세 포기하게 됐다. 임신도 하기 전에 지쳐버렸다. 집안일을 남편과 야무지게 나눴지만,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는 탓에 집안일은 금세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결혼 후 2년,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에게 ‘임신 소식’은 없다. 한때는 아이를 낳는 것이 ‘나라에 노동 인 구’를 채워주는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도 했지만, 최근에는 임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근데 직장 상사는 툭하면 묻는다.


  “아이는 언제 낳으려고?”


  상사는 오지랖으로 나의 속을 뒤집으면서도 불필요한 야근과 회식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 지금도 이런데 아이까지 두고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까? 난 절대 슈퍼우먼이 될 수 없단 사실을 확인했다.     




 면접을 봤던 세 군데 회사가 모두 기혼자란 이유로 ‘불합격’을 통보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경쟁자 중에 ‘임신을 준비하는 기혼자’가 ‘취업이 간절한 미혼’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긴 어려운 현실이라 믿는다. 아무리 이기적이라도, 굉장히 넉살이 좋아도, 기혼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배려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으니까. 서로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슈퍼우먼이 되지 않기로. 매일 6시에 일어나 아침밥 먹고 출근하고, 출근길에는 책을 읽거나 영어 공부를 하고, 회사 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가끔은 업무 관련 강의를 듣거나, 야근 하거나, 회식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을 하고, 약간의 휴식 을 위해 텔레비전을 보며 잠드는 일상. 아직 아이가 없더라도 기혼 직장인의 일상 패턴은 비슷할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부족하다고, 더 노력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이미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러니 ‘슈퍼우먼’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할 필요는 없다. 부끄러울 것도 없다. 빠듯한 일상에 조금 지쳐 있는 우리는 ‘슈퍼우먼은 아닐지언정 ‘성실한 우먼’이긴 하니까. 됐다. 충분하다. 고민을 접자. 두통 나게 고민하는 대신 ‘행복한 대안’을 찾는 거다. 직장인이 아니라도 충분히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건강한 생각과 대안. 그게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우린 이러고 있지 않는가. 나는 글을 쓰고, 당신은 글을 읽고….



     

 그리고 왈>


  두 달 전, 한 교육 회사의 면접을 봤다. 이곳은 결혼과 임신 계획은 물론 남편의 직장까지 캐물었다. 그 후 “주말 출근과 야근이 가능하냐?”고 확인한 후 이런 식상한 대사를 날렸다.


  “우린 오래 같이 일할 사람을 찾아요. 아시죠?”


  이날은 불합격을 작정하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는 면접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 잘하는 사람은 비전 없는 회사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사람을 뽑으시려면, 일단 이런 식의 면접보다는 회사의 업무 환경을 개선하시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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