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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Oct 12. 2018

기어서라도 야간 진료 병원에 가자


  아팠다. 화요일부터 시작된 어깨 통증이 두통으로 이어졌다. 사람은 아프면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상대를 베어낼 것처럼 날카로워진다. 내가 요즘 그렇다. 3일 전부터 날카로운 생각과 뾰족한 마음을 품고 출근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제는 회의 중에 말했다.


  “참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요. 오늘은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일하는 팀은 지금이 비수기다. 바쁜 업무도 없고 정시 퇴근(진짜 정시는 아니고 퇴근 시간에서 10~30분쯤 지나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계속 병원을 가지 못했다. 연차도, 반차도, 심지어 점심시간도 내 마음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란 직원, 은근히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 지만 “요즘 회사 분위기 좋지 않으니까, 다들 조심하라.”는 상사의 경고에 맞설 용기까지는 없다.


  하지만 용기가 없다고 통증까지 사라지진 않더라. 계속 아팠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아픈 티를 계속 냈고, 심지어 아프다고 말해도 병원 가라는 말을 안 한다. 냉혹하고 서러운 오피스의 세계. 그래서 내가 먼 저 말했다. 나는 소중하니까. 그런데 상사의 대답이 가관이다.


  “그럼, 점심 먹고 이따가 다녀오든가.”     




  오전 회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왔다. 한 집에 사는 남편과도 평일에는 식탁에 마주 앉아 밥 먹기가 힘들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모든 팀원이 늘 함께 식사하러 간다. 암묵적인 상사의 지시다. 이날 점심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몸이 아파서인지 미각이 둔해졌다. 경상도 주인장의 간이 센 음식이 혀끝에 밍밍하게 닿는다. 점점 얼굴색이 질려 가는지 동료들이 아파 보인다고 거들어준다. 그러자 상사는 김치찌개를 후루룩 입안에 쑤셔 넣고 말했다.


  “아차! 마케팅 부서에서 기획안 좀 수정해서 보내달라고 하던데…. 그것만 하고 진짜 아프면 병원 좀 다녀오든가.”


  ‘진짜 아프면’이란 말은 ‘그렇게까지 아파 보이진 않지만, 못 참겠으면 병원에 다녀와라’ 하는 뜻 아닌가? 더러워서 진짜! 안 간다. 안 가. 내가 사무실 책상에서 죽어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와 퇴근 1시간 전에 기획안 수정을 끝냈다. 그런데 동료의 실수로 업무 사고가 생겼다. 모든 팀원이 정신없이 일을 수습했다. 나도 함께 일을 정리했다. 힘들어서 기절할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업무는 저녁 7시가 넘어서 마무리됐다. 상사가 드디어 내 눈치를 보 기 시작했다. 피부가 까만 편인데 얼굴이 밀가루처럼 하얗게 질려서는 식은땀을 흘리고, 몇 번 비틀거렸더니 그제야 내가 정말 아파 보였던 것이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점심 먹고 바로 병원 다녀와.”


  상사에게는 점심 먹다가 죽은 귀신이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집까지는 1시간 30분에서 최대 2시간이 걸린다. 7시에 끝나도 집에 가면 밤 9시다. 점심시간에는 화가 나서 병원은 주말에 가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퇴근하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 더 늦기 전에…. 동네는 어차피 틀렸고, 회사 근처에 있는 야간 진료 병원이라도 찾아보자.


  회사와 3분 거리에 있는 작은 한의원이 밤 9시까지 운영한다는 걸 확인했다. 회사원들이 좀 있는 지역이긴 하지만, 작고 낡은 건물에 있는 탓에 환자가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접수하고 돌아선 대기석에는 나를 포함해 5명의 사람이 있었다.

  넥타이를 맨 2명의 남자, 밀착된 H라인 스커트를 입은 1명의 여자, 그리고 캐주얼 차림에 노트북 가방을 멘 나와 어떤 남자 등. 연령, 성별, 스타일, 모든 게 달랐지만 누가 봐도 모두 직장인이었고, 모두들 스마트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관심도 없는 정치 뉴스를 읽는 척하며 위안을 받았다. 하루 종일 비좁은 책상에 앉아 9시간 넘게 통증을 견뎌낸 사람은 나만이 아니구나, 하는 위안 말이다.


  기다림 끝에 진료실로 들어섰다. 의사는 먼저 피를 뽑아야 한다며 나의 등에 사정없이 바늘 자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부항을 밀착시켰다. 잠시 후 의사가 내게 말했다.


  “죽은 피가 나오네요. 많이 아팠겠어요.”


  한의사가 말한 나의 죽은 피는 까맣고 까맸다. 내가 봐도 다시 붉은 피로 회생할 것 같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다. 현관문을 열자 까만 어둠이 나를 반겼다. 남편은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12시쯤 퇴근하는 날이 빈번하다. 그 흔 한 자동 센서 조명도 없는 우리 집. 겨우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고 들어섰다. 집안이 엉망이었다. 거실에 널린 마른빨래와 냉장고 안의 유통 기한이 끝나가는 식재료들까지. 아프지만 지저분한 집을 보는 것이 더 큰 스트레스다.


  집안일을 시작했다. 내가 아프니까 남편 네가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새벽에 들어와서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이 더 불쌍한 것 같아 봐주기로 했다. 12시가 넘어 집안일을 끝냈지만, 남편은 그때까지도 퇴근하지 못했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틀어 어깨에 뿌렸다. 한결 나아진 것 같았던 어깨의 통증이 더욱 심해져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거실에 남편이 있었다. 야구 채널을 틀어놓고는 생기를 잃은 화초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오빠! 오빠! 왔어?”


  겨우 눈을 뜬 남편이 내게 물었다.


  “어… 아, 어깨는? 설마 오늘도 병원에 못 간 건 아니지?”

  “못 간 게 아니라 내가 안 간 것 같아.”

  “응?” 

  “아냐. 퇴근하고 다녀왔어.”


  통증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출근을 준비하는 발짓과 손짓은 한결 가벼워졌다. 역시 병원에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건 다르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회사와 팀 분위기에 따라 다르지만, 근무시간에는 아파도 바로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집에 가서 쉬면 괜찮겠지.’ 하면서 불필요한 야근까지 견딘다. 이럴 때는 좀 억척스럽게 행동하자. 회사 컴퓨터로 퇴근하고 갈 수 있는 병원을 당당하게 검색하고, 퇴근 후 기어서라 도 병원에 가 진료도 받고 처방도 받자.

  집으로 가는 길에는 전화로 맛있는 죽도 예약하고, 집에 와서는 죽 한 그릇 싹 다 비우고 전화기를 무음으로 하고 숙면을 하자. 물론 가장 좋은 건, 애초에 회사 출근을 하지 않고 병가 또는 연차를 쓰는 거지만.

  잊지 말자. 회사는 우리의 건강이나 통증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라도 스스로를 보듬고, 걱정하고, 챙겨주자.     




  그리고 왈>

  이 글을 쓰고 1년쯤 지나서 ‘혼밥’하려고 도시락을 쌉니다' 라는 글을 썼다. 글을 읽은 독자님은 알겠지만 나란 직원, 이제 점심시간에 억지로 끌려 다니지 않는다. 야호. 축하해달라.



  그리고 또 왈왈>

  이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고, 시간이 꽤 흐른 요즘.

  나는 바쁜 일정이 없는 날은 여전히 도시락을 가지고 출근한다. 그리고 꼭 도시락이 아니어도, 혼자 밥을 먹고 싶은 날에는 혼자 먹는다. 게다가 아프면 눈치를 보지 않고 바로 병원에 다녀온다.

  그러나 회사에서 스스로를 보듬고, 챙기기 위해서는, 지키고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최대한 집중해서 마감 기간 안에 일을 끝내고, 같이 일하는 상사와 동료와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내가 나를 보듬는 것처럼, 나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쉽지 않다. 하지만 아프고 눈치 보고 억지로 참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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