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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Oct 05. 2018

회사가 준 ‘등산의 이유’


  “하루 씨, 다음 주에 등산 테스트 있는 거 알지?”

  “네?” 


  이미 여러 번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이건 아닌데!’ 싶었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선 신입사원으로 합격하면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수습기간의 업무 태도와 평가를 통해 정규직으로 정식 발령을 내겠다는 건데, 통과의례 같은 것일 뿐.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대부분 정식 발령이 났다. 그렇다고 나사 하나쯤 빼고 다녀도 되는 건 아니었다. 단거리 장애물 경주처럼 통과해야 할 테스트가 계속 있었으니까.

  테스트는 단순했고 어렵지 않았다. 선배들보다 일찍 출근하기, 상사의 고드름 같은 농담에 헤프게 웃기, 회식 자리에서 아이돌로 변신하기, 할 일 없으면서 야근하기 등. 대부분 업무와는 관련이 없지만, 조직 생활과는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 다 좋다. 다 이해 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등산만 빼고!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입사한 첫날, 인사팀 담당자는 신입사원들을 모아놓고 등산 테스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신입사원들의 끈기, 열정, 인내심을 확인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테스트입니다. 우리 회사의 전통이기도 하고요.”     


  물론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끈기, 열정, 인내심이 필요할 수 있다. 근데 등산과 회사생활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등산말고도 이런 것들을 평가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꼭 모든 사람을 등산으로 평가해야 하는 걸까? 왜 항상 회사의 전통은 직원들을 동원해서 만들어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신체로 끈기, 열정,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많다. 사우나에서 오래 버티기. 하루 동안 삼천 배 올리기. 개그 콘서트 보면서 웃음 참기 등 셀 수 없이 많다. 굳이 등산이 아니어도 말이다.




  남들은 조용히 있는데 이러는 나만 비정상일까?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진단받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친구는 대기업 신입 사원 연수중이었는데,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야! 등산은 하루 안에 끝나잖아. 나는 지금 2주 넘게 그런 걸 매일 하고 있어. 다시 군대에 온 기분이야.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행군했어. 조별로 한 명의 낙오자도 없어야 통과라는 거야. 그래서 서로 가방 들어주고, 부축하고, 누구는 힘들다고 울고, 다들 죽는 줄 알았어. 다른 조는 서로 예민해져서 그런지 싸우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지. 암튼 그렇게 힘들게 도착하고 나니까 담당자가 뭐라는 줄 아냐? 조직생활에서 중요한 ‘협동력’을 키워주려는 훈련이었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친구는 넌 타박할 상황조차 안 된다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우린 다행인 줄 알아야 해. H는 해병대 훈련 갔대. 회사에서.”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회사생활과 등산, 행군, 해병대 훈련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깨우침의 시간이다, 이것이 사회생활이다, 인재를 발굴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는 식의 두루뭉술한 답변말고 좀 납득이 가는 답변을 듣고 싶다. 깨우침이야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 느끼는 것이고, 사회생활이야 하다 보면 느껴지는 것이고, 인재 발굴이야 기본 3단계를 거친 채용 전형에 있던 것 아닌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등산 테스트의 날이 밝았다. 어느 가을 선선한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하필 토요일인지.

  이른 아침부터 엄마의 등산복을 입고 테스트 장소로 향했다. 도착하니 인사팀 담당자가 보였다. 처음 입사했을 때 ‘등산 테스트가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해줬던 담당자였다.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민방위 훈련 때 입는 군복 바지와 빨간색 바람막이 점퍼,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까만 선글라스와 밀리터리 스타일의 모자까지. 국내산 갈치 스타일의 정장을 즐겨 입던 회사에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산은 등산을 즐기는 사람도 쉬지 않고 큰 보폭으로 가야만 3시간 안에 정복할 수 있는 산입니다. 오늘 우리도 3시간 안에 이 산을 정복합니다. 단! 혼자 도착한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같이 출발하는 동기 모두가 함께 도착해야만 정복으로 인정됩니다. 알겠습니까?”


  그는 테스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친 후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었다.

  동기 중에 여자는 나와 E, 단둘뿐이었다. 나는 작고 단단한 몸매의 소유자로 여자치고 맷집이 좀 있었다. 반면 E는 가늘고 마른 몸매로 목소리까지 배고픈 모기처럼 앵앵거리곤 했다. 그래서 남자 동기들은 출 발할 때부터 그녀의 배낭을 들어줬다.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튼튼한 몸매를 가진 것을. 근데 E는 왜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대면서 계속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던 걸까. 살짝 물어봤더니, “넌 여자의 기본이 안 돼 있다.”는 짜증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출발했고, 인사팀 담당자도 따라 올라왔다. 담당자는 우리 속도가 느려지거나 거리가 멀어지면 호루라기를 빽빽 불어대며 소리쳤다.


  “속도가 늦습니다!”

  “동기는 하납니다. 모두 함께 정상으로 갑니다!”


  그가 소리를 지른다고 급격하게 떨어지던 체력이 되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보기와는 달리 나는 거울을 좋아하던 E보다 더 헉헉거렸다. 역시 오르막길은 내 스타일이 아닌지 경사가 심해질수록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나중에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절대 터지진 않더 라). 멀리 정상이 보이는 지점부터는 스치는 모든 나무에 내 지문을 남기며 올라갔다. 그러자 담당자는 내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


  “조직생활은 그 경사보다 더 험난하고 힘듭니다! 그렇게 약해 빠져서 는 버텨내지 못하고 낙오자가 됩니다. 우린 하납니다. 한 사람이 낙오 되면 함께하는 동료와 상사가 힘들어집니다!”


  이 이야기에 감동한 건지 짜증이 난 건지 한 남자 동기가 가던 길을 돌아 내려와서는 내 팔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30분만 더 가면 정상이야. 여기서 늦어지면 3시간 안에 정상 못 찍어. 그럼 다 끝장이야. 내가 너 끌고 갈 테니까 참고 속도 좀 내봐.” 


  순간 화가 나서 그 동기의 팔을 확 뿌리쳤다. 그리고 가방이라도 대신 들어주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죽을힘을 다해 산을 올라갔다.     




  결국 3시간 안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반대편 코스로 올라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수고했다며 도시락과 물을 나누어줬다. 후들거리는 다리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다들 정신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한 차장님이 말했다.


  “어때요? 반찬이 별거 없는데도 도시락이 꿀맛이죠? 회사도 그래요. 야근에 주말 근무에, 일이 많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거든요. 근데 딱 그 업무를 해내고 나면 보람도 생기고 성취감도 생기고. 딱 이 도시락처럼 꿀맛이죠. 여러분이 오늘의 기억을 잊지 않고 회사생활의 힘든 고비마다 떠올려줬으면 좋겠어요.”


  모두 힘차게 박수를 쳤지만 동기들의 표정이 무척 복잡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도시락 꿀맛을 회사 노동과 비유하는 차장님의 이야기를 듣자니 식욕이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보란 듯이 도시락을 내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그 후 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확신하게 됐다. 노동의 꿀맛은 보람이나 성취감이 아닌 월급에 있음을.     




  그리고 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여자 동기보다 예뻤다. 나란 여자, 살만 빼면 예쁜 얼굴이란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때는 살을 빼지 못해 그랬고, 지금도 역시 살을 빼지 못했다. 아니다, 오히려 더 쪘다. 내 기억으론 얼굴은 내가 더 예뻤던 것 같다. 확실히! 그렇다고 남자 동기들이 내 가방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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