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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메스 May 05. 2023

불안과 평화롭게 반려(伴侶)하며 살아가요, 우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불안은 완전히 잠재우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내면이 강인하고 건강한 사람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치명적인 질병이나 인생의 실패, 가까운 사람들이 주는 상처에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다. 불안을 생각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불안을 줄이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과 평화롭게 동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는 게 훨씬 현실적인 방법이다. 


불안이 노력으로 조절되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아쉽게도 불안은 그렇지 않다. 불안은 생명유지에 기여하는 필수적인 기질로서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치 심장 박동을 노력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조건들은 '자동으로' 작동한다). 불안한 마음은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생존력을 올려준다. 현실로 닥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대비한다. '불안한 마음'을 기질로 가진 개체가 살아남아 현생인류가 되었다는 점에서, '불안'에는 생존하기에 유리한 작동원리가 숨어 있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누구나 일하기보다는 쉬고 싶고, 좀 더 자고 싶고, 치열하게 고민하기보단 멍 하니 머리를 비우고 싶어한다. 불안한 마음은 게으르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에 불을 지펴서 생존을 고민하며 열심히 활동하게 만든다. 



출처: 유튜브 <아홉시>, 유현준 출연


유명한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미래가 불안하지 않다면, 관계가 불안하지 않다면, 건강이 불안하지 않다면, 나의 자아 정체성이 불안하지 않다면, 열심히 삶을 살아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 '지금 이대로도 좋다.'라는 안도감에 휩싸여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을까? 요컨대, 적당한 불안은 인생을 자기주도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마치 스트레스처럼 말이다. '불안'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현대사회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개인을 미친듯이 불안하게 만든다. 과도한 불안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불안의 긍정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방 힘을 잃는다. 불안은 반드시 피해야 할, 없으면 좋은 것이 되어간다. 적당하면 약이 되지만, 과도하면 독이 되는 것들을 떠올려보라. 그것들은 불안과 닮아 있다.


당장 TV를 틀어보자. 세상이 금방이라도 망해버릴 것 같고, 인간의 악한 본성에 혀를 내두르게 되고,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천재지변의 끔찍한 장면들이 반복 재생된다. SNS에 접속해보면 나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온갖 화려하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홍수가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급격한 인플레이션, 초고령화 사회, 취업난, 극심한 전세 사기 등등 삶의 정주 조건(住 條件)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사회적 불안 또한 임계치에 가까워진다. 21세기는 '불안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풍요로운 사회에서,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 속에서, 개인은 고립되어 간다.




해탈해버린 티벳 여우 짤


그렇다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술에 만취한다거나, 큰 돈을 써서 쇼핑을 한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기서 거론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보단,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방법을 고민해본다. 정말 많은 방법들이 있겠지만, 나는 '비빌 언덕'에 집중할 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있는 모양새라고 했던가. 앞으로 펼쳐볼 이야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인간은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우리는 꼭 타인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의지하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것이 연인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돈이 되었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비빌 언덕'은 반드시 필요하다. 불안에 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비빌 언덕'에서 나온다.



출처: <한국일보> '다윈은 미래다' 기획특집


종교를 먼저 생각해본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지구상에서 종교(기독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 전쟁으로 인한 대량학살, 인간들을 광신도로 만들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것, 인간의 주체성을 잃게 한다는 것, 논리적인 과학에 대항한다는 것 등등의 근거를 댄다. 하지만 한국에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위 사진처럼 둘은 2009년도에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최재천 교수는 종교의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힘에 주목하여 종교의 가치를 옹호했다. 예컨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굴러떨어진 사람이 평화로운 얼굴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불안을 물리치는 종교의 엄청난 힘을 체감했다는 것이다(최 교수는 부인을 따라서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나도 최 교수의 말에 동감한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세간을 뒤집어 놓은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jms 같은 사이비 종교들이 활개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불안한 삶에 평온과 위안을 건네주는 종교가 훨씬, 훨씬 더 많다. 돈, 과학기술 등으로는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는 불안의 근원적인 핵심을 꿰뚫는 힘이 종교에는 있다. 종교는 '논리'가 아닌 '영성(性)' 위에서 축조된 건축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의술처럼 육체의 어려움을 직접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정신의 거룩함'을 만끽하게 해준다. 피조물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극한의 선'에 해당하는 신의 존재는 세상만사의 불안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지독한 불안을 종교에 '기대어' 해결하는 것은 수십 만년 이상의 영겁의 시간 동안 증명되어온 불안에 대항하는 방법이다. 종교는 우리에게 대표적인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



출처: 블로그 <안현기,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연인, 가족, 친구 등의 타인과 연대하고 화합함으로써 함께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도 무척이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비빌 언덕'이다. 세속적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돈에 기대어 불안을 물리치는 방법도 매우 합리적이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돈은 행복을 만들어주는 데에는 서툴지 몰라도, 불행을 예방하거나 해결하는 데에는 무척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돈에 관련된 불안이 얼마나 많은가? 돈만 있으면 1차적으로 해결되는 불안의 양을 생각해보라.


결국 핵심은 나만의 '비빌 언덕'을 어떻게 찾느냐로 귀결된다. 나는 행복, 자아실현, 사랑 등의 추상적인 말을 정말 싫어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전혀 제공해주지 못하면서 대책 없이 아름답기만 한 말들. 그래서 화를 내거나 침을 뱉지 못하게 만드는 말들... 무언가에 기대고 의지하여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나약한 자의 선택이 절대로 아니다.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 불완전한 인간은 반드시 기댈 무언가가 필요하다.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인간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불안에서 꺼내달라고, 나를 제발 도와달라고 무릎 끓고 기어가서 비는 사람은 비굴한 사람일까? 나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싶다.


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겠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나와 함께 불안을 이겨내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 종교에게, 타인에게, 돈에게, 무언가에게 빌면서 부탁하는 것. 대상은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형체가 없는 '순수한 믿음'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괜찮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것일지라도 내가 그것에게서 위안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의 가치는 분명하다. 불안과 맞서는 방법은, 뻔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무언가와 연대하여 힘을 합쳐 맞서는 방법밖에는 없다. 


언젠가 인간이 신이 된다면, 그때는 스스로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문장을 쓰면서 '완벽한 인공지능'을 상상하고 있다. 슈퍼 컴퓨터로도 계산할 수 없는 세상의 온갖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궁극의 인공지능이 완성된다면, 그때야말로 인류가 불안을 뛰어넘어 스스로 우뚝 설 날이 아닐런지.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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