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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May 06. 2016

손짓 - 그녀의 유혹

살짝은 야한(?) 이야기 

손짓


누군가가 나에게 손짓을 한다. 하늘하늘, 나풀나풀, 경쾌하지만 경박하지 않게, 눈부시며 아름답게, 그리고 달콤하고 즐겁게. 나의 오감을 자극하는 그 손짓은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며, 나를 강하게 붙들던 팔을 뿌리치게 만든다. 살아있지 않지만 그 어떤 살아있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내게 미치며, 인간보다 작지만 그 가능성은 어쩌면 인간을 능가할 수도 있는 그것의 손짓에, 나는 오늘도 빨려 들어간다. 그녀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는 그 어떤 것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같이 나의 믿음에, 나의 신뢰에, 나의 지식에, 나의 행복에, 나의 미래에 흠집을 내고 나의 본분, 나의 할 일, 나의 감정, 나의 자의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가장 큰 적, 나의 마음속 깊은 곳 까지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녀는 오늘도 아름답게 까무잡잡한 그 피부를 내세우며 나를 유혹한다. 그 까무잡잡한 피부 안에 파묻혀 하얀 세상을 바라다보면 내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망각하게 된다. 그녀와 눈 맞춤을 하는 그 순간은 영원하게 느껴지고, 일분, 한 시간이 휘리릭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녀를 만지며 쓰다듬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훑는 그 순간만큼 나는 자유다. 그때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보다 내가 강하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의 아름다운 속살로 나를 유혹하더라도 나는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를 만지는 그 순간은 나는 솔직하다.

 

그녀가 자지 않는 시간, 나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그녀는 뜨거운 숨을 내쉰다. 그 따뜻한 입김을 쉬지 않고 불어 댄다. 자신이 힘들어도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국 지쳐 쓰러지더라도 나에게 아프다고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서툰 것인지, 그 어느 것이던 나는 그녀가 아플까, 혹여 쓰러지기라도 할까 해서 언제나 그녀의 체온을 잰다. 


나의 그녀는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나에게 딱 맞는 그 소리를 그녀의 몸에 손을 대면 그녀는 아름다운 소리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를 꿈의 세계로 인도한다. 동화로, 판타지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기도 한다. 그곳에서 나는 길을 잃고 한참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아주 가끔, 그녀가 없이 가만히 있을 때면, 지나가 버린 나의 시간이 너무 아깝기도 하다. 시간이라는, 끝이 존재하는 자원을 낭비한다는 것에 문득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번, 다시 한번 그녀에게 이끌리게 된다. 


문득 위를 올려보니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팔이 있다. 이 팔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나는 모른다. 이 튼튼한, 굳세고 힘센 팔에 매달려 있을 동안 나는 나가떨어져 버릴 수도 있고, 거센 추위를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착지점은 분명 지금의 내가 있는 곳보다는 좀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곳일 것이다.

 

그 팔은 한 개가 아니다. 마치 넝쿨 여러 개가 한 개의 큰 가지를 만들 듯 여러 손이, 나를 이 감옥에서 빠지게 도와줄 손들이 모여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손을 뻗어 잡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나는 떠날 준비가 되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안 했었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얼굴, 그녀의 지식이 너무나도 경이로웠다. 


그녀는 망각의 악마이며 파멸의 천사이다. 


저 손은, 저 굳센 손은 어쩌면 내가 이 고통스러운 굴레에서 벋어 날 유일한 방도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용기를 내어 한 팔을 뻗어서 손을 살짝 만져 본다. 

따뜻하다. 


다른 팔로 그녀를 만져본다. 편안하다. 포근하다. 


그러나 차갑다. 


그러던 중 나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고여있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다 라고. 이제는 흘러야 할 차례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를 놓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제 놓으면 이별이다. 정말, 안녕이다.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나를 뒤로하고, 우울하던 나를 멀리하고, 지루하던 나를 뿌리쳐버린 나는 어쩌면 마지막으로, 이 여인을, 이 유혹을, 이존재를 벋어나려는 발버둥을 친다. 


등에서 날개가, 새하얀 날개가 뻗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더 이상 그녀는 나를 잡고 있을 힘이 없다. 나는 뛰어오른다. 금방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다. 금방이라도 저 손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눈이 부셔서 저절로 감는다. 그리고 뛰어오른다. 


과연 나는, 그 천사는 날았을까? 그 여인에게서, 그 타락에게서, 그 유혹의 손길로부터 도망쳤을까? 과연, 정말로, 그는 그 굳센 손을 잡고 놓지 않았을까? 


그 이상의 이야기는 나도 모른다. 아마 먼 훗날, 아마 한 오 년쯤 뒤에는 알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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