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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edy Jul 04. 2016

Agit

아지트 이야기 - 2015

아지트


뭔가 나만의 아지트(?)라고 생각했던 곳에 요즘 누군가가 계속 침입한다. 오타와 대학 변두리에 잠시 닫혀 있는 카페가 있는데 대부분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조금 어수선한 학교 도서관보다는 나의 아지트에서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어떤 노숙자 같은 백인 아가씨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 아가씨는 옷을 저따구로 입고 왜 오는 거지 하면서 조금은 짜증 났지만 나는 그것을 최대한 숨기고 내가 할 일을 했다. 일단 봤을 때 저 여자는 여기서 밤에 잠을 잔다. 내가 밤늦게까지 여기에 있을 때 그녀는 대각선 부근에서 목도리로 눈을 가리고 자곤 했다. 물론 나는 매너남이라 갈 때는 불을 꺼주고 갔지 훗.


또한 얼마 전에 알게 된 것은 이 여자는 옷을 만든다는 것이다. 두 권의 드레스 아이디어 공책하고 커튼 같이 생긴 옷감을 쓱쓱 자르고 생각하고 꿰매기도 하고 하면 네다섯 시간이면 어느 정도 윤곽을 갖추게 되는데, 야하고 몸매가 사는 옷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 알 수 있는 디자인이다.


나는 원래 아트 스튜던트 어소시에이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있곤 하는데, 나는 당연히 그곳의 멤버가 아니기에 내가 그곳의 비밀번호를 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더욱이 그렇기에 저 백인 여자가 있는 때에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제기랄.


오늘은 왠지 그냥 방해받고 싶지가 않아서 앞으로 들어오는 문을 잠갔지만 아마 돌아서 온 모양이다. 저놈의 근성이란…


사람의 주변 시야라는 것은 정말 성가신 것 같다. 남자라 상대적으로 좁은 주변 시야를 가진 그대로 살았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 바로 옆에서 하얀색에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 있는 저 여자가 그냥 보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뛰어난 주변시야느님은 사방을 체크하고 있다. 그나마 안경을 벗어서 별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야한 것을 보는 것을 줄여서 인지 노출에 면역이 적어졌다. 물론 캐나다라 노출을 하는 여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나는 여자 몸을 함부로 보는 사람을 경멸하기에 얼굴만 보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의 본능에 의하여 잠깐 보더라도 능글맞게 계속 보지는 않는다. 하여간 나는 저 여자가 엄청 부담스럽다. 머리 색깔이 은발 이여서 나이를 알기도 어렵다. 저번 주에 말을 잠깐 걸었는데 자는 포즈도 농염하고 말할 때 왜 그렇게 상체를 부각하는 건지, 일부러 저러는 건지 정말 짜증 난다. 나한테 부각하려는 것이 아니라 습관인 것 같기는 하다.


나는 내 아지트를, 그곳이 어디던, 침범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타와에는 이런 아지트가 얼마 없다. 있는 것들도 다 “나만 아는 곳”은 아니다. 그런 곳을 찾기에는 내가 가는 곳이 너무 한정되어 있다. 토론토에 있을 때는 커다란 개울에 다리 같은 것 틈에 자물쇠가 잠겨진 곳이 있었다. 그곳을 따서 열고 들어가면 나쁘지 않은 아지트가 된다. 낡고 녹이 슨 것을 보아 아무도 오지 않은 때가 꽤나 된 것 같은 비주얼에 콘센트까지 있어서 알맞춤 이다. 한국에서 내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운동 실력이 있었을 때는 구석을 이용해서 상가 꼭대기로 올라가서 누워있곤 했었다. 편안하고 졸렸고, 자다가 늦어서 혼날 때 들키기 싫어서 게임하다가 왔다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참 잘하던 것들을 이제 잃어버린 것 같다. 뭔가를 올라타는 것 이라던지 문을 딴다던 지 하는 것들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는데, 그냥 내가 내 몸무게에 비해서 약한건지 이제는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이 아지트도 개학하면 끝이다. 뭔가 슬프다. 여기서는 마음 놓고 웃고 울고 비트박스 하고 춤추고 소리 지를 수 있었다. 계단에 방음이 안되어 있어서 발자국 소리가 두 층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부터 들리기 때문에 내가 뻘 짓을 하고 있다면 멈출 시간은 충분했다. 문득 저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말했을 때 보니까 내성적인 성격은 전혀 아니던데 이렇게 노는 때에 클럽이나 파티를 안 가고 뭐 하는 걸까. 통화 내용을 들어 보니 남자 친구도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싸우고 헤어졌나?


저번 주에 이 여자는 갑자기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운 것이 조금 티 나는 모습으로 밖에 나왔다. 아마 창피해서 최대한 숨기고 온 것 같지만 우는, 울 것 같은, 울고 난 후에 모습을 지겹도록 본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뭐라고 먼저 말하기는 이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아지트를 침범한 이상한 사람에게 뭔가 동정심이 갔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주었고 문에 귀를 댄 결과 펑펑 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내가 나간 것이 정말로 잘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궁금했다. 이 여자는 내가 과연 그녀를 위해서 불을 꺼주고 나가주고 등의 배려를 했다는 것을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내가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모르고 지나가겠지. 알아주기를 원해서 한 행동이 아니더라도 이젠 틈만 나면 궁금하다.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하는 짓의 의미를 얼마나 알까? 그걸 알게 된다고 해서 나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낄까?


귀찮아만 하고 상대를 알아보려고 하는 노력은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나의 겉모습만 보고, 누군가의 속마음을 보지 않고 좋아한다느니 이상하다느니 하는 말을 지껄이는 사람들은 덜 떨어진 인간이라고만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들은 그저 그런 사람들일 뿐, 그들이 나빠서, 혹은 내가 좋은 사람이기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은 사람, 그렇지 않으면 나쁜 사람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렇기에 이기적인 사람은 나쁜 사람, 이타적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닐까? 결국 이타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나름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이타적인 것인데 단지 자신에게 쓸모 있다고 좋은 사람 취급을 한다니, 인간의 모순성은 끝이 없는 듯하다.


친구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서로에게 말해주지 않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믿음이 큰 사이일수록 그 믿음은 쉽게 금이 가는 법이다. 한번 금 간 큰 믿음은 다시 고쳐지더라고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아이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디의 매니저가 그랬었지. 미워하는 사람에게 욕먹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욕먹는 것이 두려운 것이라고.


나는 내가 비극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나에게는 자기 애인의 과거, 혹은 헤어진 사람의 현재 애인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해어진 사이인데 뭘 그리 신경 쓰고 난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그런데 당해보니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는다. 다만 “그냥” 신경이 쓰인다는 것. 그리고 밤늦게 까지 남자 친구랑 같이 있다는 걸 알면 여자가 아닌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웃기지 않은가. 남자가 무슨 죄지? 어떻게 보면 여자랑 남자가 밤늦게 있어서 일어나는 불상사의 더 큰 책임은 여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자는 필시 남자가 밤이면, 특히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 앞이 면성적인 충동을 이겨내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건 진화심리학적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충동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까지의 여지와 시간을 준 여자도 잘못을 피할 수는 없다. “믿었다” 라는말 한마디로 책임이 전가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물론 남자의 잘못도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실망을 하던, 혐오감을 느끼던 사랑이 바로 접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드디어 왜 한국 나이트 코어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가사는 슬프지만 둠칫 하면서도 신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한국 노래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노래가 많고 그것들은 대부분 느려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노래들을 빠르게 만들고 높이면 신나게 된다. 즉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끝을 어떻게든 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다. 애매한 관계라도 좋으니 그냥 이렇게라도 있으면 안 되나 싶다. 하나님의 세 가지 사인을 기다린다. 아직은 어떻게 하라는 한 가지 의사 인도 보지 못했다. 계획은 둘 다 세워 놓았다.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그냥 만들어서, 음정도 박자도 가사도 엉망인 노래를, 마음속에 할 말들을 그냥 노래 형식으로 뿜어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몇 개 리코딩해봤는데 진짜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지옥에서 망령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랄까. 웃기게도 그래 도아 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나의 진심이 들어가 있기 때문 아닐까.


정리를 하려면 모든 것을 지워야 한다. 사진도 지우고 선물도 버리고 차단도 해야 한다. 그러고 일 년 반을 기다려야 하겠지. 내 핸드폰도, 페북도, 컴퓨터에도, 방에도 그녀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


궁금하다. 내 다음 여자 친구가 내가 아직도 전 여자 친구의 사진이나 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넘어가 줄지. 웃기게도 난 그냥 넘어가 주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해주는 여자 친구를 만났으면 한다. 엄청난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아무리 현 여자 친구 이어도 전 여자 친구의 것을 완벽히 버리라는 것은 좀 너무한 것 같아서 말이다. 그 여자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테니까. 내가 이런 것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내가 욕심이 많다는 증거겠지. 아마 남자에게 전 여자란 자신을 바꾸어준 고마운 존재이고 여자에게 남자란 고마운 사람 이하라는 이상한 스트레오 타입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룰을 만든다. 그것에 대한 법칙을 만들고 그것에 상응하는 벌을 만든다. 남을 위해 서던 나를 위해 서던 어떤 특정한 룰을, 법칙을 만드는 이유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다. 괴로우니까, 힘드니까 하는 것이다. 죄책감이 그냥 너무 크다. 내가 힘들게 한 많은 사람들은 내가 원인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보면서 웃기도 한다. 날 칭찬해 주기도 하고 나보고 가장 친했던 친구라는 호칭을 주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나의 연기 능력에 감탄하고 우쭐해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것 보다 미안한 마음, 악한 나에 대한 역겨움이 몰아친다.


나는 엄청난 겁쟁이이다. 내가 겁쟁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하는지, 또 무엇을 원하는지 와는 별개의, 단순한 팩트 일 뿐이다. 이 사실을 아무리 멋있게 포장하고 회피하려고 해도 나는 “두려워한다”라는 진실을 감출 수 없다.


쿨 한 나의 모습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에게 나도 호감이 가는 경우 나는 나의 속마음을 절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쿨”한 “쓰레기통” 으로써의 레미디 이기에 그들의 호감을 그대로 가지기 위해, 위선 쩌는 개새끼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지내야 한다. 그것이 진짜로 두려웠는데, 이제는 외로운 것이 더 두렵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는 쿨 해야 한다. 나는 자존심이 많지는 않지만 그녀 앞에서 만큼은,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지키고 싶다. 매달리고 싶지 않고 놔주고 싶은데 그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아마 웃기겠지.


나는 나를 과소평가하곤 했다. 나를 과소평가하는 습관은 내가 조금 더 철저해지게 도와주었다. 나를 과소평가한 덕분에 계획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었으며 동일한, 아마 더 많은 사람에게 체계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힘들어질수록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어 진다. 누군가가 괴로운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위로를 얻는다 고나 할까. 그런 식으로라도 우월감을 느껴서 자기 위로를 해야 한다. 아마 이걸 자제해서 사이코 모드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다시금 혼자가 되고 나니 어째 혼자가 아니였던 시간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둘 이라는 것은 어찌도 이리 허망한 것인지, 장자의 나비의 꿈 처럼 내가 커플이였던 것인지 커플이 나였던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허무하고 의미없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커플이 되고 솔로가 되기를 반복하겠지. 마치 어떤 알고리즈믹한 저주같다. 아프고 성장하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이자 축복인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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