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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내리는 눈

by 서은율


내가 사는 곳은 겨울 내내 눈 구경을 할 수가 없는 곳이다. 아무리 추워도 폭설은커녕 눈 한 올 날리는 일이 없으니 일기예보에 눈 올 확률이 60%라는 말을 보아도 그냥 건성으로 넘기곤 했다.


3월이 되어 달력의 숫자가 바뀌자 아이들은 이제 봄이 왔다고 두꺼운 패딩을 그만 입겠다고 외쳤지만, 지난 주말부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와서 추웠다. 다시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어야만 했다.


오후에 필요한 걸 사느라 다이소에 다녀왔다. 물건을 사서 나오는데 흩날린다. 하얀 눈송이가 천천히 눈에 띌 만큼 내려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화창하다. 파랗게 맑은 날씨다. 그런데 눈이 내리고 있다.


It's snowing in the blue sky.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사진 찍으면 눈이 나오냐고 묻는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눈으로 눈을 담는다.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이클 볼튼의 "When a man loves woman'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운명의 '암시' 같은 것,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내 손에 쥔 해바라기와 봉선화 화분처럼 이 봄날에 날리는 눈꽃송이는 기쁨을 의미하는 거야.


지난겨울은 많이 움츠려 있었고 걷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이젠 아니야.


찬바람 속에서도 목련 나무의 꽃봉오리가 새침하게 무언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나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는 거야.


새로 사 온 카드링 단어장을 펼치며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기록해 보는 거야.

살아가면서 특정한 찰나를 기억하는 일이 종종 있다.


오사카의 인적 드물던 큰 도로를 건너서 마주한 해 지는 풍경이라던가, 수영을 마치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데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제목은 알지 못하지만 분명 내가 좋아했던 노래.




또, 방콕 샹그릴라 호텔 로비에서 남편과 작별하던 일, 아이들을 차례로 안아주고 마지막에 나를 안아주었지. 그날은 헤어지면서 울지 않았다. (공항이었다면 울었을 테지만..)


오늘도 그날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작년 봄, 탭 파우치에 벚꽃으로 새겼던 희망을 기억하며 올봄에도 환하게 웃고 있을 벚꽃을 기다린다. 벚꽃이 흩날리는 날에 커피 한 잔 들고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고 싶다.


이제 눈은 그쳤지만, 아주 짧았던 그 순간에 눈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행운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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