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지겹고도 다정한 반복

by 잠전문가

"당신은 몇 살까지 그랬는데?"

"나? 음... 결혼 전까지?"


대답과 동시에 풉 웃음이 터졌다.

코 앞에 두고도 내게 물건의 행방을 묻는 아이를 보며, 몇 살 쯤이면 엄마한테 뭐 어딨냐 소리 안 할까 탄식을 하던 차였다.


잠시 눈 앞에 십여 년 전의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진다.

"엄마! 스타킹 빨아 놓은 거 어딨지?"

"엄마! 내 모자 못 봤어?"

"엄마! 식탁에 둔 티켓 치웠어? 아 그거 버리면 안 되는데 왜 허락도 없이 치워!!!"


엄마! 엄마!! 엄마!!!

우리 딸 다섯 살, 결혼 전 내 나이 스물여덟.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진다...

망 했 다.





전에 비슷한 시기에 엄마가 된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조용한 시골집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내고 싶다고. 지금은 어린이집이라도 다니지만 가정보육을 하던 시기에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번 들려오는 엄마 소리에 가끔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엄마 찾는 아이, 여보 찾는 남편 없이 하루라도 조용히... 누군가 날 찾지 않는 하루가 그 어떤 선물보다 간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엄마라고 달랐을까 싶다. 더하면 더 했겠지.


남편이 낄낄거리며 아이가 외할머니 대신 복수를 해주는 거란다.

허 나 참. 얄밉지만 허를 찔린 듯 할 말을 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엊그제 이유 없이 짜증 내는 아이에게 참다 참다 화를 내며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다 커서도 나는 종종 그런 딸이었다.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던 날도, 아빠와 다툰 날도, 입을 옷이 마땅찮아 괜스레 기분이 꿀꿀한 아침에도... 내 짜증은 개연성 없이 엄마에게로 향하곤 했다.


아이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때로 아프기도 하지만 어쩌면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엄마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은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를 키울수록 진하게 번져간다. 지난날을 참회하며 최대한 다정한 딸이 되려고 노력한다. 아이에게는 내 모습을 겹쳐 보며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라고 쓰기엔 양심이 치를 떨고 있...)


1.jpg 철없는 딸과 철 없는 딸을 키우는 철 조금 든(?) 딸과 그 엄마


며칠 전 아이가 좋아할 레고 한 상자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큰 맘먹고 샀다. 잠든 아이 몰래 커다란 박스를 낑낑거리며 포장하는데 환하게 웃을 아이 얼굴이 떠올라 행복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부풀었다. 그리고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힘들게 살았을 젊은 엄마의 크리스마스는 어땠을지. 어린 남매 손 잡고 선물가게에 가서 가장 작은 박스의 레고를 하나씩 들려 나왔을 젊은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 큰 것을 해주지 못해 미안했을지, 선물을 사줄 수 있어 행복했을지. 문득 따뜻하고 서글픈 감정이 울컥 치민다. 그 시절의 엄마를 안아주고 싶다.


엄마와 딸, 딸의 딸...

아이도 커서 또 자기의 아이를 보고 나를 떠올릴까. 어쩌면 그럴 일이 없을 수도 있겠지.

어찌됐든 우리는 이렇게 같은 패턴을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다. 그렇지만 또 모르지. 이 한결같은 패턴이 멀리서 보면 한 폭의 아름다운 점묘화가 될지도.

이토록 지겹고도 다정한 반복 속에서 나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 철없는 딸로. 철없는 딸을 키우는 엄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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