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나오자마자 문자가 왔다.
반가운 택배 소식!..... 은 소식인데 발신인을 보고 반가움에 약간의 공포가 더해졌다. 집 앞에 도착하신 분은 다름 아닌 김. 장. 김. 치
우리 시어머니는 손이 정말 크신데 뭐든 보내주시면 차고 넘쳐 처치가 곤란할 정도다. 집으로 향하는 길, 이번엔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 양을 보내셨을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계단을 오르다 보니 어디선가 매콤하고도 강렬한 한국의 향이 풍겨온다. 집 앞엔 단단히 포장된 15킬로 박스가 두 개.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자태 자체로 중력을 뿜뿜하고 있는 단단한 박스를 보며 택배 기사님의 허리의 안녕을 기도해본다. 엘리베이터 없는 3층.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아무도 없는 아파트 복도에서 박스를 향해 묵념한다.
큰 숨을 들이쉬고 박스를 개봉한다.
박스를 열자 군산의 구인구직과 부동산 정보가 깨알같이 적힌 벼룩시장이 까꿍- 한다. 참 멀리 왔구나 너도.
크고 두꺼운 김장비닐로 두 겹 세 겹 꽁꽁 묶인 비닐 위로 야무지게 덮인 지역신문에 마음이 휘청한다. 아들네 한 포기라도 더 먹으라고 꾹꾹 눌러 담아 여미고 여민 후 신문을 덮었을 어머님의 모습이 선하다. 코딱지처럼 찌깐한 것을 김치냉장고랍시고 사서는 마음껏 보내지도 못하게 한다며 자리에 있지도 않은 우리 부부를 타박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더 못 담는 아쉬움을 달래며 먼 곳에서 그리움과 걱정, 사랑을 담아 한 방울도 새어 나오지 않게 단단히 포장해 보냈을 당신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결혼 6년 차. 신혼 시절엔 어머님이 보내주신 식당 스케일의 음식양에 놀라기도, 싫기도 했다.
'이걸 언제 다 먹어? 맞벌이하는 부부가 얼마나 먹는다고...'
다 처치(?) 하지 못해 냉장고에 터줏대감처럼 역사를 쓰다 하얗게 피어 사라진 어머님의 음식들이 그간 얼마나 많았는가.
하지만 아이를 낳아서일까. 나이를 먹어서일까. 언젠가부터 어머님의 음식이 너무 귀하다. 다 먹고 못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며 마늘을 빻고 비비고 무쳤을 그 두툼하고도 고단한 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잘 챙겨 먹는지, 사는 곳에 좋은 식재료들은 많이 파는지 늘 걱정인 그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냉장고에서 하얗게 피어가는 조상님들이 안 계신다는 것은 아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스케일임을 기억하자. 다행히 지금은 이웃들에게 나누며 같이 먹는 융통성이 생겼다.)
"김장 좀 안 했으면 좋겠어."
얼마 전 양가 부모님들의 대대적인 김장 기획 소식이 들려오자 우리 부부는 이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김치가 싫어서가 아니다. 양념 한 사발을 휘저을 때마다 팔이 얼마나 아픈지, 쪼그려 앉아 배추에 양념을 바를 때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무릎 아프신 어머님, 밤낮으로 일하는 우리 엄마를 떠올리면 김치고 뭐고 그냥 싫어진다. 싸가지 없는 자식들 말로 하자면 '그 김치 그냥 사 먹고 말았으면' 싶은 것이다. 시간이 있고 거리라도 가까우면 같이 양념이라도 묻혀가며 홀랑 홀랑 집어 먹고 재롱도 부릴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이것도 다 자식놈들의 얕은 변명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김치를 정리하고 덜어 먹으며 양심 없이 '언제까지 이런 김치를 먹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박스를 열며 한숨 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연신 맛있다 맛있다 하며 맛깔나게 물든 배추를 집어 든다. 주변에 김장하는, 김치를 담글 줄 아는 또래들은 거의 없다. "엄마도 할머니 되면 나한테 이케 해줘야 돼~!" 하며 야무진 소망을 외치는 딸을 보며 흠칫하는 나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할로윈 보다 크리스마스보다 핫한 어머님들의 시즌, 빨갛고 아삭한 사랑을 보내는 김장 시즌이 시작된다. 정기구독처럼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그러나 언젠가부터 오지 않을 이 뜨겁고 뭉클한 선물을 어쩌면 좋을까. 지금이야 많다고 투덜대고, 좋다고 받아먹지만 더 이상 지역신문도, 빨갛고 아삭한 선물도 오지 않을 때면 무척이나 그립고 슬플 것 같다. 유령 얼굴을 한 호박이나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전구 따위가 커다란 김치박스만큼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면 벌써부터 쓸쓸해지는 이기적인 딸이다.
딩동!
반가운 택배 소식이 또 왔다.
반가운 소식은 소식인데 발신인은 우리 엄마. 공포의 김치 박스가 하나 더 온단다.
감사하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택배를 맞는다.
우리는 이렇게 저 멀리서 온 엄마들의 사랑을 먹고 한 해를 난다.
손으로 집어먹고, 지져먹고 또 볶아먹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