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일이라고오오~ 32 일이라고 오오~
그렇다. 매 해 마지막 날이면 겹치는 선곡 따위는 생각도 안하는지 같은 주파수에서 시간마다 별의 '12월 32일'이 주구장창 흘러나온다.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삼십 대 중반에 내려 꽂힌 새 나이가 나는 별로 반갑지 않은데, 요 며칠 우리 집 꼬마는 몇 밤을 더 자야 여섯 살이 되냐며 성화다.
야근이 예정된 남편은 다섯 살의 아이를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까불락 거리는 녀석을 끌어안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출근했다. 남편 없이 씻기고 먹이고 치우며 피곤이 몰려오는 저녁을 보내자면 종종 말 안 듣는 아이한테 "이노옴~" 호령도 하고, 제발 이제 자자며 애원도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든 것에 너그러워지는 날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다섯 살의 모습을 추억상자에 넣어야 하는 날. 아쉽고 애틋하다.
"엄마, 나 춤 한 번만 더 추고 잘래! 노래 더 틀어줘. 응?"
자기 싫어 떼를 쓰는 아이 모습은 똑같은데 오늘은 왠지 단호하게 빨리 자라고 하기가 싫다. 밥 먹을 때도 헤헤거리고 팔짝거리며 한 마리 원숭이 같이 구는 모습은 어제와 같지만, 평소처럼 인상 쓰며 다그치지 못하고 앉아라 앉아라 하다가 같이 웃어버린다. (십 분 이상 얌전히 앉아 밥 먹는 아이를 둔 사람은 도대체... 전생에 독립운동가였던걸까? 그럼 난 나라를 얼마나 판 것 일까. 갑자기 전생성찰타임)
몇 번이고 꼭 껴안고 엉덩이를 토닥이고 엉성한 막춤에 같이 폭소를 터뜨린다. 해야 뭐 매일 뜨고 마지막 날이나 첫 날 따위 인간이 정하고 의미를 붙인 것이라지만, 그래서인지 새해의 일출 같은 것에 크게 감동해본 적도 없지만 그랬던 나도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변하나 보다. 다섯 살 아이의 모습이 내일이면 그리워질 것 같아서 아쉽고 아까운 시간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다짐한다. 아낌없이 웃으며 사랑하며 보내자고. 모든 날들을 아이를 만나는 마지막 날처럼 그렇게 아쉬움 없이 충만하고 따뜻하게 보내자고.
... 는 어제의 일기.
오늘의 나는 무슨 말을 가장 많이 했는가?
"이제 여섯 살 언닌데 이럴 거야?", "여섯 살 됐는데 좀 달라져야지!"
이렇게 나는 또 하루 만에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피곤해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감흥 없이 보내고 말았다.
남편과 번갈아가며 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저녁쯤엔 이런 우리 모습이 너무 웃겨 농을 던졌다.
"이쯤 되면 얘 여섯 살 된 거 후회하는 거 아냐?"
좋아하는 작가, 김영민 교수의 칼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침을 열 때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어제 다섯 살 아이와 안녕하고, 오늘 여섯 살 아이를 만났다. 해가 지고 다시 뜬 것뿐인데 뭔 호들갑이냐고 하지 말고 이번엔 호들갑 좀 떨어보련다. 2020년 12월 31일, 라디오에서 "31일이라고오오 32이일이라고오오~"가 울려 퍼질 무렵 여섯 살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더 뜨끈하게 가득하게 가슴을 메울 수 있도록.
반가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