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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07. 2020

어쩌면 인생은 나만의 레시피북을 만들어가는 과정

요즘 요리에 자신감이 좀 붙었다.

그렇다고 뚝딱뚝딱 뭐든 금방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고  레시피를 보되 각종 양념의 비율이나 간을 가감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나름의 기준으로 하며 맛을 낼 수 있게 되었달까.

결혼 직후, 엄마는 <한복선의 요리 1 학년>이라는 책을 사줘서 남편이 엄청 놀렸는데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이제는 가끔 밥 두 공기씩 해치우는 마성의 메뉴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입으로 말하기 뭐해서 글로 씀)


요리 1학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숴.


처음엔 그랬다.

레시피에 쓰여 있는 모든 재료가 냉장고에 있어야 했고, 대체할 수 있는 재료 따위는 떠올려볼 수도 없었다. 중량도 레시피대로, 양념 비율도 레시피대로. 요리 고수인 남편은 이런 나를 보고 '그 요리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사지 말고, 있는 재료로 만들만한 메뉴를 생각해보라'라고 조언했다. 그만큼 나는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재료를 오직 그 메뉴를 만들기 위해서 사고 조금 쓰고, 또 방치하여 냉장고 유물을 만들곤 했다.


둘이서는 어떻게 대충 때우기도 하고, 시댁과 친정에서 받은 반찬과 외식 등으로 지내왔지만 아이를 낳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파기름을 내거나 멸치 다시마 육수를 만드는 등의 요리 상식을 레시피와 남편에게 배우며 조금씩 해보다 보니 요리 실력이 늘며 약간의 요령도 생겼다.

얼큰한 탕을 끓이더라도 고추장을 많이 넣으면 텁텁해지니 고추장은 조금만 넣고 된장과 고춧가루로 간을 조절한다거나 뭔가를 우려서 맛을 내는 경우(고기나 미역) 물을 조금만 넣고 팔팔 끓인 후에 또 조금씩 물을 추가해 끓이는 방식으로 짧은 시간에 깊은 맛을 낸다거나 하는.


레시피는 어느 정도 요리의 흐름(?)만 확인하고 맛은 알아서 조절한다.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하다간 낭패를 볼 수 있는데 그 레시피 주인이 엄청나게 짠단(짜고 단)을 추구하는 스타일일지, 또는 사찰음식 애호가 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레시피 맹신은 그래서 안 된다. 요리 1 학년 때 많이 울어봐서 안다. 따흑.




오늘 왠지 안 풀리는 수영 (언제는 풀렸나아...)을 하며 왠지 모르게 요리 1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요령이란 것을 모르던 때. '레시피대로가 아니라면 죽음을 달라' 식의 융통성 제로 주방의 불도저...

1m 수심 레일에서 호흡이 딸려 혼자 재난영화를 찍으며 푸닥거리를 하다가 옆 레일 중급반을 보았다. 모두가 여유롭고 그럴듯한 자세로 자유형을 하고 있었지만 숨 쉬는 타이밍이나 입 모양, 머리 각도가 제각기 달랐다. 하다 보니 본인만의 자세가 만들어진 것일 테다.

정석대로 하되 나만의 미묘한 타이밍과 자세. 나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음... 요리 1 학년 시절을 떠올려보니 하는 수 없다. 물 많이 먹고, 코 매워하며 컥컥거리고 헉헉거리며 실패할 것. 실패하며 알아낼 것. 나만의 요령을 말이다.


초보 6개월차지만 아직도 물에 뜨는 게 용한 엉터리 수영도, 동네 소식지에 글이 기재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수준의 글쓰기도, 아이를 키우는 일과 사람을 대하는 일도 여전히 첩첩산중 1 학년이다. 하지만 백종원도 감탄하겠다는 평의 고추장찌개를 만든 어제의 나로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줄기 희망을 바라보려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지침은 참고하되,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갈 것.

하루는 좌절, 하루는 희망일지라도 이렇게 '어제보다 나은 나'가 되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설레는 일이다. 어쩌면 인생의 맛은 나만의 레시피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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