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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ul 30. 2020

유원 _백온유 장편소설

'또 다시' 살아남아야 했던 아이의 두 번째 생존기

창비의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은 <아몬드>와 <페인트>에 이어 세 번째 읽는다. 그간 읽어온 책들로 내게 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은 '믿고 보는' 신뢰가 생긴 것 같다. 좋은 청소년 문학 작품은 왠지 고리타분해져 버린 나를 망치로 꽝 내리치는 느낌이랄까. 정체된 나를 환기시켜 주는 기분이 든다.


       


  


소설의 제목 <유원>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원'이라는 외자의 이름은 '원하다'라는 뜻으로, 동생을 원하고 또 끔찍이 사랑했던 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언니는 윗집 담배 꽁초로 부터 발한 화마로 세상을 등졌다. 여섯 살 원이를 젖은 이불에 돌돌 싸서 창밖으로 던진 채. 그 '이불 아기'를 얼결에 온몸으로 받은 이웃 아저씨는 오른쪽 다리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화물 트럭 운전사라는 직업을 잃고 한동안 재활 치료를 받았다. 각 매체에 '의인'으로 떠들썩하게 기사가 난 아저씨는 적지 않은 성금을 받았지만 결국 다리는 평생 절게 되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의 편협하고 안일한 사고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삶으로 살아보는 체험, 그 과정 속에 이해의 깊이를 더하는 데 있다.

몰랐지만 나 역시 살아남은 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실제로 '이불 아기', 혹은 '은정동 화재 사건' 등으로 난 기사를 봤다면 소설 속 댓글들처럼 참 다행이다, 아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거나 그 아저씨는 평생의 은인이겠구나 따위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생존자의 '다음 생존'을 이야기한다. 언니의 기일마다 찾아오는 죄책감, 아저씨 인생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 언니를 대신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무력감, 때마다 맡겨둔 것이 있는 것처럼 집에 찾아와 사업비 명목의 돈을 요구하는 아저씨를 바라보는 역겨움... 열여덟 살 유원은 그런 것들에 짓눌려 살아간다. 

놀이터에서 소리치며 놀던 아홉 살 남짓의 유원에게 "적어도 너는 그러면 안되지"하며 불쾌한 표정을 하는 할아버지를 마주하는 일. 그런 것들을 무작위로 경험하며 커가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도리질이 쳐지고 목이 죄어온다. 12 년 전의 '살아남은 일'은 이렇게 소화불량 같은 느낌으로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유원을 잠식한다. 순식간에 유원과 동화되게 만드는 작가의 세밀한 감정 묘사가 놀랍다.


생존은 했으나 언니 대신의 삶, 두 배로 행복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삶, 아저씨에게 평생 감사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유원은 외롭다. 보는 눈과 하는 말들에 지쳐 혼자 있는 것을 주로 택하는 유원에게 마스터키로 웬만한 옥상을 자유롭게 다니는 옥상 마니아, 수현이라는 친구가 생기며 이야기는 나아간다. 조금씩 조금씩 잠겨진 세계에서 더 트인 곳으로, 자유로운 곳으로 닿기 원하는 유원의 변화를 담고 있다.


유원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일을, 언니를, 가족들을, 아저씨에 대한 부모님과 친구의 이해 방식을 깊이 바라본다. 그리고 미워하는 일, 그로 인한 죄책감과 자기혐오라는 무한 루프 속에서 벗어나 '두 번째 생존'을 위해 한 발을 뗀다. 그 방식이 어찌 됐든 더 이상 '이불 아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유원을 응원한다. 읽는 동안 마음이 많이 아팠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아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한다.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간단히 결론 짓지 않는 마음, 넘겨짚지 않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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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은 내가 웃을 때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어하고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행복을 바랐다면서도 막상 멀쩡한 나를 볼 때면 워낙 뜻밖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_ 84p


"너보고 언니 몫까지 행복하라고 하지? 두 배로 열심히 살라고, 그런 말 안해?"

"해."

"적당히 행복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두 배나 행복하게 살라는 거야." 

짜증을 내다 보니까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_ 113p


수현이 열어젖힌 옥상의 하늘이 생각났다. 수현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바람. 먼지 가득한 창고. 노을과 애드벌룬, 오랜 기다림.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목소리들. _ 197p


그러나 미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중략) 벗어나야 했다. _ 197p


"영화에서는 시거를 사이코 킬러라고 부르는데 나는 시거 같은 사람은...... 그냥 돌멩이 같은 거라고 생각해."

"돌멩이?"

"교회 주차장에 깔려 있는 자갈 같은 거 말이야. 뾰족뾰족하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그냥 그런 상태인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상태인 거야. 거기에 내가 넘어져서 긁히고 베여도 화를 내는 게 무의미한 거야. 내가 돌멩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무의미한 거고, 돌멩이가 내 감정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인 거야." _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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