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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Nov 25. 2020

완벽하지 않은 채로


밥 먹어라 밥 먹어라 스물다섯 번, 치카해라 치카해라 열한 번쯤 외치고 아이를 등원시켰다. 빛 좋고 바람 없는 아침이다. 아이를 보내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6 세 아동과 함께하는 평일 아침은 경황이라는 게 없으므로 세수는커녕 마스크에 갇힌 코에 대한 예의로 양치만 하고 나왔다. 이 꼴을 본다면 어차피 쌀 거 왜 먹냐며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냐며, 아무 일 없어도 집에서 화장하고 지내는 엄마가 등짝 스파이크를 날릴 것 같지만.

모자와 마스크를 쓰니 이제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니기 일쑤다. 이 빌어먹을 문신 같은 마스크가 바이러스 CUT도 모자라 UV CUT까지 해주는데 왜 안 쓰고 지랄이야! 왜!! 갑자기 닿을 데 없는 화를 내본다(...)


보통 산책도 계획을 하고 나가는 편이다. 어느 코스로 걸을지, 짧게 걸을지 길게 걸을지. 물론 사설이 길면 설사 같은 결말(응?)이 보통인지라 그렇게 짱구를 굴리다가 산책은 무산되는 편이 많다.

'이따 점심 먹고 소화시킬 겸 걸을까?' 하고 계획 세우면 엄마가 김치를 보내줘서 허버 허버 정리하며 김치와의 대사투를 벌이다 아이 하원 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설거지랑 청소만 해놓고 나갈까'하고 시간 내어 나가면 잠잠하던 바람이 갑자기 싸다구를 날리며 아주 세상이 네 계획대로 되냐며 혼쭐을 내기도 한다.


오늘은 걷다 보니 세수도 안 한 얼굴로 멀리까지 갔다. 동네 관광지인 천제연 폭포를 한 바퀴 걸었다. 관광지에 눈곱 달고 오는 것이야 말로 네츄랄 도민 바이브 아닌가. 하핫.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도 거의 없다. 바다가 보이는 정자에 홀로 앉아 마스크를 내리고 실컷 바람을 쐰다. 뽀얀 구름에 이런저런 내 마음도 둥실 올려본다. 보고 싶은 엄마와 친구들, 아이와의 대화, 먹고 싶은 케이크...

핸드폰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아 아끼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듣지 않고 그야말로 '멍'을 때리니 슬그머니 행복이 스민다. 새소리, 따뜻한 볕과 시원한 바다, 명랑한 하늘. 계획하지 않은 채로 마주한 것들은 완벽에 가까웠다.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은 채로 맞이하는 의외의 기쁨에 대해서. 이른 아침 관광지의 고요, 시답지 않게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스스로의 마음을 벅차게 하는 글, 별다른 준비 없이 만난 딸의 신비하고도 빛나는 성장. 계획이라는 것은 때로 나를 옥죄고 두렵게 한다. 계획하지 않은 채로 흘러가면서도 더 좋아지고 나아지고 뭔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은 욕심일까.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도 있지만 때론 인생이라는 강에 던져진 내가 둥둥 떠 흘러가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반문하게 된다. 그저 흘러가는 동안 아름다운 장면과 따뜻한 마음, 고운 말들 그런 것들 건지며 살 수 있다면, 하고 소망하게 될 뿐.


생각들을 떨치고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카페가 보인다. 케이크 있다. 폭포는 이제 내 입에서 흐르기 시작한다. 며칠 전부터 달달한 디저트가 생각나던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카페까지 가서 아침 댓바람부터 티라미수를 시킨다. 맛이 없다. 티라미수 씨, 도대체 냉장고에 몇 박 묵은 건가요. 살얼은 케이크는 포크도 잘 안 들어갔다.

엊그제부터 간절히 생각나던 디저트 맛집이 있었는데, 넓은 공간도 아니고 사람이 많아서 안 되겠다 했었다. 이 딱딱한 티라미수에 초 꽂듯 포크를 내리꽂고 있자니 역시 원래 가려던 곳에 오픈 시간을 공략해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다행히 입에 맞는 고소한 커피를 입에 머금으며 생각한다.

역시 사람은 계획을 세워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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