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상념

by 잠전문가

최근 이사를 했다. 같은 동 303호에서 404호로.

집의 이동 동선은 단 두 획 뿐인데, 이 년은 족히 늙은 듯한 이 피로감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희망차고 힘이 솟는 이사는 역시 자가 입주뿐인가! 하는 닳고 닳은 상념과 함께 묵은 피로감에 또 하나의 피로를 더해본다.


세간살이가 빠져나가 텅 빈 거실은 그 집이 사는 동안 어땠는지와 상관없이 왠지 모를 쓸쓸한 감정에 빠져들게 한다. 장애물 제거 게임처럼 거침없이 신속 정확하게 빠지는 짐들... 물건들이 차 있던 공간은 허무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한다. 이사는 보통 이른 아침에 시작되다 보니 찬란한 햇살이라도 들이치게 되면 집의 구석구석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가 되는데, 굴러다니는 먼지와 아이의 낙서, 크고 작은 흠결들은 숨을 데가 없다는 듯 머쓱하게 낯을 드러낸다. 먼지처럼 지난날들이 복잡하고 미묘하게 엉켜 마음속을 나뒹군다.


1.jpg 오래된 아파트 그 구석구석 손때 묻은 흔적들을 마주하며


이삿날 아침, 짐을 싣고 나르는 장정들 사이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잡다한 짐들을 나르며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화장실의 세안 도구들을 바구니에 담아 나가려던 찰나, 화장실 문 옆 작고 알록달록한 흔적을 보고 나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물감 묻은 아이의 손으로 벽을 짚은 자국, 지우려다 더 뭉개져버린 색깔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던 아이의 흔적이다. 어린이용 물감의 화사한 색으로 옅게 남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을 볼 때마다 당황한 아이의 표정과 욱하던 나의 말들을 떠올린다. 아마도 서울에서 제주로 이사한 지 얼마 않아 피곤하고 정신없을 때고, 사고는 좀처럼 치지 않는 아이였기에 당황스러운 감정에 그 소동을 벌였던 것 같다.


물감놀이를 하다가 뭐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아이는 징징대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팔레트와 물통을 본인이 들고 가 치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찰나 비틀거리며 물감 묻은 손으로 벽을 짚었던 것이다. 아이의 투정을 참고 참다 하얀 벽에 찬란히 안착한 형형색색의 핸드프린트를 본 순간, 씩씩 김이 새며 과열의 징조를 보이던 뚜껑은 그만 열리고 말았다. 안하무인 짜증을 부린 것, 엄마 말을 안 듣고 본인이 치우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에 대한 훈계가 아닌 화는 늦은 오후의 피로와 버무려져 아이에게 뜨겁게 쏟아졌다. 물론 그날도 자책과 반성의 밤을 보냈겠지만 짐이 다 빠져버린,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닌 그곳에서 마주한 그 흔적은 나를 더 허탈하고 씁쓸하게 했다.


겁에 질린 아이 표정과 서럽게 흘리던 눈물, 씩씩거리던 내 모습이 물감 자국에 오버랩되며 지난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부질없는 후회가 몽글몽글 피어났다. 아휴, 이게 뭐라고. 이 작은 손자국이 뭐라고.

글쎄...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나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애를 태우면서.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면서. 돌아보면 어리석었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노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며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흠칫 두려운 마음까지 이는 나는 여전히 바보다.


이사를 여러 번 해봤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들은 지난 삶을 반추하고 앞을 내다보는 여러 모양의 감정들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지금 머무는 곳에서 후회 없이 사랑하기. 떠나야 할 때 미련 없이 떠나기. 어찌 될 줄 모르는 앞날에 너무 많은 감정을 소비하지 않기...

저 멀리에서 지금의 나를 본다면 지금 전전긍긍하는 일들이 어떻게 느껴질까 궁금하다. 이쯤 되니 품이 많이 들고 심지어 나를 늙게 만드는 이 이사 행위가 어쩐지 숭고하게까지 여겨지는 건 왜일까.


아, 그래도 이번엔 제발 4 년이라도 살기를. 보름새 마이 늙어버린 세입자는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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