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상자를 든 아이처럼

by 잠전문가

"글쎄 오늘은 케이크 박스를 가지고 나왔어요. 엄마 내가 이겼어! 하면서요."

"아이들은 참 행복이 쉽네요. 좋겠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자유 만들기 재료로 각종 재활용품을 제공한다.

덕분에 아이는 요거트 통으로 만든 화분이랄지, 종이박스로 만든 가방이랄지 쓸데없이 귀엽지만 정말 쓸데가 없는 그런 것들을 주렁주렁 들고 하원 한다. 아이 친구 엄마와 쓸귀쓸무 업사이클 이야기를 나누다 웃음이 터졌다. 오후 간식으로 나온 케이크보다 케이크 박스에 진심인 아이들. 치열한 경쟁 끝에 케이크 박스를 차지한 아이가 얼마나 의기양양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전리품을 들고 나왔을지 생각하니 심각하게 귀여운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었다. 엊그제 티비에선 한 스님은 행복을 추구해서 불행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행복이라고. 그러니 행복 말고 안심을 추구하라고.

행복이라는 큰 덩어리가 눈앞을 가리면 작지만 예쁘고 귀한 것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사랑, 이별, 삶, 방향성, 성취... 사람마다 성향도 가치관도 다르겠지만, 어린 날 나를 압도하던 이런 커다란 주제들은 더 이상 나를 압도하지 못한다. 오히려 검질매는 아주머니의 등허리, 시냇물 흐르듯 굴러가는 아이들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수많은 사소한 조각들이 소리 없이 소리친다. 이런 게 삶이라고.


케이크 박스 하나로 하루치 행복을 가득 채워 가는 아이를 보니 기특하고 장하다. 더 멋진 걸 원하라고, 더 큰 걸 성취하라고 호들갑을 떠는 세상에서, 쉽지 않겠지만 이런 작은 행복 놓치지 않고 커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쉬운 행복, 사소하고 자그마한 행복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 그런 것들 마음에 들일 수 있는 한 칸 자리도 잘 마련해두고.


빙긋 웃으며 읽었던 어제의 청소년 시 한 편을 붙여본다. 우리에게는 happy and 가 필요하다.




해피엔드 _ 오은


친구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주인공이 꿈을 달성해서, 오해가 풀리고 갈등이 해소되어서, 내일부터는 왠지 좋은 일들만 일어날 것 같아서. 그러니까 결말이 행복해서.

나는 드라마가 별로야. 친구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듯이,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듯이. 친구는 지금 이 순간을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린다.


책상 사이에 보이지 않는 네트가 세워졌다.

나는 공을 받고 넘겨야 한다.


막판에 모든 일이 물 흐르듯 해결되잖아. 실제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 나만 해도 그래. 고민이 많은데 해결된 게 없어. 하루하루 늘어나기만 한다고.

드라마는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잖아. 그것도 싫어. 내 삶의 주인공은 난데, 드라마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잖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어.


나도.

친구가 바로 대답했다.

공을 잘 넘긴 것 같다.


나는 도중에도 행복하고 싶어.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두 번. 어제를 생각해도 오늘을 살아도 내일을 기다려도 조금은 설레고 싶어. 짧아진 봄에도 가을에도, 길어진 여름에도 겨울에도.


친구가 네트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며 말했다.


우리에겐 해피 엔드(happy end)가 아니라 해피 앤드(happy and)가 필요하네.


공을 넘기고 받는 시간만큼은

우리는 분명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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