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딸, 엄마 디스코 머리 좀 땋아줄텨
고성은 아침에 질러야 제 맛이라고 했던가. (응?)
여느 아침과 같이 촉박하게 흐르는 시간과 내 마음 같지 않은 아이의 외출 준비로 인내심이 임계치에 도달해버렸다. 적당히를 아직 모르는 아이한테 적당히 하라고 혼을 낸다는 것이 굉장히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지만 이미 적당하지 않은 하이톤으로 적당을 외쳐버렸으니 적당히 무마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이는 아이대로 화가 난 엄마에게 미안하고, 나는 나대로 화를 내서 아이에게 미안했다. 애매한 공기 속에서 네 맘대로 알아서 하라고 차갑게 말해놓고 내 할 일을 했다. 아이는 아빠와 속닥거리더니 쭈뼛거리며 내게 온다.
"머리 좀 묶어주면 안 돼?"
엄마한테 부탁하기는 싫은데, 스스로 묶긴 역부족이고 아빠가 묶어주는 모양새는 영 마음에 안 들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똥자존심의 못난 엄마는 내심 아이의 부탁이 반가워 얼른 머리를 묶어주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큰소리 낸 것을 사과한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 머리를 묶어주고 높은 선반의 물건을 꺼내 주는 것. 내가 아이에게 내세울 부모 노릇이라는 게 이렇게나 알량한 것들이다. 아이가 다 크고 나면 나에게 부탁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돈이나 땅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요원하다.) 어른이 된 딸과 다투게 되면 그땐 어떤 사소한 것들로 풀 수 있을까. 허옇게 센 머리를 들이밀며 엄마 디스코 머리 좀 해주면 안 되냐고 물어볼까.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을 쥐고 동동거리는 내 모습이 우스운 아침이다.
2. 네 행복 내 행복 천 원
여기 서귀포 시골 동네에선 천원샵이 거의 백화점급이다. 없는 것 없는 '다있소'로 쇼핑을 가는 것은 아이에겐 특별한 이벤트다. 아빠가 출근해서 날씨 좋은 주말에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 아이는 엄마 눈치를 살살보며 강짜를 놔본다. 공원 가자 해도 싫다, 레고 놀이하자 해도 싫다 삐딱하게 나가다가 엄마가 '다있소 쇼핑'이라는 카드를 꺼내면 바로 콜!을 외치는 것이다. 늘 그렇듯 데굴데굴 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리는 일곱 살 잔꾀를 모른척 해주기로 한다.
금액을 정해놓고 사고 싶은 것을 고르라 했더니 아이는 핑크색 헤어피스를 집었다. 작은 집게핀에 컬러가발을 붙인 것으로, 브릿지 염색(가닥 염색)을 한 것처럼 연출할 수 있는 악세사리다. 속으로 뜨헉 했지만 마음껏 고르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사자마자 뜯어 머리에 꽂아주니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엄마는 이런 거 싫지? 엄마는 시크릿쥬쥬(공주풍 캐릭터)도 싫어하잖아."하고 묻는다. 농담으로도 없는 말 못하는 나는 답한다.
"어. 디게 싫은데 너가 디게 좋아하니까 좋아 엄마도.”
아이는 신이 나 하루종일 머리에 꽂고, 만나는 친구마다 자랑을 하고, 잘 때도 하고 잤다.
분홍 헤어피스 값은 딱 천 원. 이렇게 싼 값으로 아이는 행복을 얻고, 나는 아이의 웃음을 얻는다.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만족의 가격이 아직까진 저렴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속세의 엄마.
3. 내 머리 살려
아직 제 손으로 머리를 못 묶는 아이는 늘 머리 묶기를 연습한다. 남편이 머리가 길었으면 무척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연습 상대는 나.
고사리 같은 손은 내 머리를 한 손에 쥐기도, 고무줄을 돌려 넣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고무줄에 씹히고 엉키고 당겨진다.
아아악. 으악. 내 머리 살려.
너 감정 많이 쌓였니? 막 카타르시스 느끼고 그러는 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