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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y 24. 2021

내가 아니면 누가


"왜 동생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하고 그냥 막 갔어~ 같이 좀 놀아주지."

놀이터를 다녀오는 길이다. 놀이터에서 한 세 살쯤 더 어린 동생이 계속 아이를 불렀다. 같이 놀자고, 자기도 철봉 하고 싶으니 좀 잡아달라고 누나 누나 하면서 따라다니는 동생을 아이는 쌩 하고 피해 다른 곳에 가서 놀았다. 머쓱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와 야속한 듯 쫒았다니는 어린아이를 보니 괜히 내가 다 민망했다. 집에 오면서 왜 그랬냐 물으니 쑥스러웠단다. 아! 그랬지. 그제야 나의 아이가 낯가림을 한다는 것을 상기했다. 어른들에게는 자주 입을 닫았지만 한참 어린 동생에게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을 못한 것이다. 아이와 다니다 보면 이런 상황들을 많이 만났다. 낯선 어른들의 인사엔 얼음이 되는 아이 대신 내가 두 번 세 번 인사를 반복하며 민망해했고, 누군가의 호의 앞에서도 선뜻 감사를 표하지 못하는 아이를 다그치기도 했다.


쑥스러움을 타다 못해 쌀쌀맞아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나를 늘 당황시킨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보다 당황한 사람은 아이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인사가 목 끝까지 차오르다가도 이내 꿀꺽, 긴장한 마음과 함께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순간들. 나는 아주 숫기 없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 배가 살살 아파왔고, 처음 만난 사람과 쉽게 말을 틀 수 없어 천년 같은 무음 속에 손톱만 잡아 뜯던 적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닥치면 당장 내가 민망한 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실속도 없고 때론 별 의미도 없는데 어른들이 그렇게 목숨처럼 챙기는 그것, 체면. 체면을 지키겠다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사람들을 웃기겠다고 배우자를 농담 거리 삼기도 하고, 제 체면을 살리기 위해 자식을 끝없이 닦달하기도 한다. 나도 그 체면을 챙기느라고 아이 마음은 뒷전이었던 것 아닐까.



엄마도 춤 춰봐! 하면 같이 추고 싶지만 현실은 어우 왜 이래 부끄럽게 


내가 아니면 누가.

아무도 몰라줘도 내 아이 마음을 알아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엄마다. 어쩌면 한 번 보고 말 사람들 시선보다 중요한 것은 평생 함께 할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인데 많은 순간 이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들 앞에서 농담을 한다고 아이를 소재 삼고, 인사성이 없다고 핀잔했던 나의 가벼움을 돌아본다.


집에 온 아이는 인형을 잡고 "언니가~ 도와줄게~" "이렇게 하면 편하지?" 하며 쫑알쫑알 역할놀이를 한다. 마음과 다르게 쌀쌀맞은 장면을 연출하고 온 아이는 이렇게 제 상상의 세계에서라도 상냥한 언니가 되어본다. 작은 등을 눈으로 어루만진다. 언제까지고 세상의 기준이라는 것에 지지 않고 아이를, 아이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좋은 것을 모두 해주겠다는 약속보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너를 자랑스러워하겠다는 약속이 더 크고 위대하게 느껴진다. 지키기 위해 끝없이 의식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 그래서 사랑은 숭고하다. 구차하고 속 좁은 나라는 인간에게 아이는 매 순간 그 숭고한 것을 올려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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