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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ug 24. 2022

시각적 다이어트 -4kg

아이 방학의 마지막 주말, 여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물놀이를 다녀왔다. (이제 놔줄 테니 그만 가길 바란다.) 작지만 있을 것 다 있는 깔끔한 숙소와 바베큐장, 무엇보다 널찍한 야외 수영장에 끌려 펜션을 예약 한터다. 


두 달 전부터 운동삼아 실내 수영장을 다녔지만 야외 수영장의 맛은 좀 다르지 않나. 튜브 타고 두둥실 떠다니면서 "여행할 땐 여기 어때~"를 불러야 할 것 같고 왠지 찰박찰박 물을 끼얹는 짓궂은 장난도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처럼 공놀이에 진심인 청년들에 덩달아 활기가 돌고, 작열하는 해에 미지근해진 수온에서 꼬르륵 잠수대결을 펼쳐도 좋을 것이다. 몰래 나와 숨 쉬고 다시 입수하는 딸내미를 못 본척하며 잠수왕 타이틀을 붙여주리라!


원래 야외 수영장에 갈 땐 긴소매 티셔츠 형태의 헐렁한 래시가드와 물놀이용 반바지를 입었다. 군살이 알차게 붙은 몸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그랬는데 이게 물속에선 영 불편한 거다. 흐느적흐느적 거추장스러워서 올여름부터는 남이 보든 말든 딱 붙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는다. 이번 여행에서도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고 그간 연습해온 영법을 구사하며, 평영 하는 남편 머리도 내리누르고 잠수해서 아이 엉덩이도 간지럽히며 즐겁게 놀았다. 


그리고 수영복 모양대로 탔다. 까맣게. 

샤워 후 거울에 비춰본 내 몸은 투명 수영복을 입은 것 같았다. 어깨끈부터 수영복 뒤판의 디자인이 고대로 내 몸에 새겨졌다. 꼴이 우습긴 마찬가지였지만 아이와 나는 서로를 가리키며 깔깔거렸다. "엄마 몸 좀 봐." "너는 엉덩이만 하얀데?!" 하면서.


"엄마 시각적 다이어트했네."

아이는 새까매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보고 폭소를 터뜨린 광고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커다란 글씨로 적힌 태닝샵 현수막 문구였다. 

[시각적 다이어트 - 4kg]

신박한 광고였다. 다이어트는 본래 '식이조절'을 뜻하지만 우리는 '날씬한 몸을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이어트로 총칭하곤 한다. 시각적 다이어트라니. 일종의 말장난인 태닝샵의 이 홍보 문구는 까만 피부가 조금 더 탄탄(날씬) 해 보인다는 면에서 조금 일리가 있는 것도 같았다. 


우리끼리 장난으로 한 말이지만 오랜만에 본 지인에게도 제법 탄탄하고 날씬해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내 몸무게는 매우 성장지향적인 녀석이므로,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는데도. 비록 바지는 여전히 힘겹게 잠기지만 티셔츠와 바지 아래로 보이는 내 구릿빛의 팔다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다. 아, 이래서 태닝을 하는구나.


태닝샵엔 가보지는 않았지만 얼떨결에 시각적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말았다.

나는 태닝샵의 현수막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떡볶이를 못 참아도, 공복 유산소 운동을 못해도 "대안은 얼마든지 있어!" 하는 듯한 마법의 문구,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말. 

이것은 잘 살고 싶은 욕구에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소망에도, 괜찮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에도 긴장을 해소하고 희망을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를테면 '개성(은) 있는 그림', '오늘 못 써도 내일은 쓰는 작가', '떡꼬치(만 잘하는) 장인 엄마'랄까. 꼭 살을 빼서 다이어트는 아니지만 뭐 그럭저럭 그래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처럼, 목표에 접근하는 방법은 꼭 하나가 아닐 터. 이런저런 다양한 방법으로 비벼(?!) 볼 수 있지 않겠나.


'완벽하게 잘하지 못할 바엔 아예 하지 말지'가 내 오래되고 못난 습관이라 일어났다 폭싹 폭싹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제는 시각적 다이어트스러운 삶의 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또 참지 못하고 떡볶이를 먹어도 내겐 구릿빛 피부를 만들어줄 태양이 있으며, 명문은 못써도 쓸 말은 많다. 

그림을 전공한 지인에게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좀 배울까 한다고 말하자 배우지 않은 그림이 더 매력 있다는 조언이 돌아왔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대충 살자' 짤을 아는가. 

난 그게 참 마음에 든다. 뭣이 중한디. 일단 사는 게, 뭐라도 하는 게 중하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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