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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Nov 04. 2022

내 고급 취미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이제는 젊음도 없는 나. 하지만 이런 내게도 자랑할 것이 하나 있다. 심지어 나의 자랑을 들으면 부러워하는 사람이 여럿 된다. 그건 바로 시간이 많다는 사실이다. 돈으로 시간을 산다는 말을 들으면 손을 옆구리에 건방지게 얹고 으하하 웃고 싶어진다. 난 돈으로 안 사도 이미 많지롱! “그냥 안분지족 타령하는 한량이라고 말해!” 내 안의 자격지심이 아우성을 치는 것 같은데 무시하기로 한다.


각종 방송에 행사에 돈을 쓸어 담는 연예인들이 차 안에서 김밥을 먹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본다. 승승장구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인정받는 사람 중에는 일에 몰두하느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현저히 적은 경우도 많이 본다. 등가교환의 법칙. 나는 돈은 거의 못 벌지만, 시간은 많다. 바꿔 말하면 조금 슬퍼지니까 이 또한 하지 않기로 한다.


초등학교 일 학년, 여덟 살 딸을 키우고 있는 나는 출산과 육아로 벌어진 경력의 틈을 미처 꿰매지 못했다. 엄마 손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되면 나름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이도 저도 어려워서 부유하는 시간을 즐긴다. 아니, 즐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모든 전업주부가 나처럼 시간이 여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을 챙기고 집을 집답게 돌아가게 하는 건 상상 초월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니까. 나는 미니멀리즘을 잘못 배운 탓에 하라는 집 정리는 하지 못한 채, 대충 먹고 대충 살며 살림만 미니멀하게 한다.

겨울이면 집 앞 택배 대리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가끔 글을 써야 할 일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상태로 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생산성과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의 시민1답게 꽤 빡빡하게 살아왔던 나로서는 결혼과 출산 이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좀 당황스럽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내 삶의 자리를 인정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인생의 어느 한때는 생산성과 효율과는 거리가 먼, 그런 시절도 있는 법이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바쁜 이 시대에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 해 먹고 누가 만나자고 하면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나간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예매하고, 도서관 서가를 하염없이 서성이며 반나절을 훌쩍 보내기도 한다.




시간 부자인 내가 하루 중 가장 아낌없이 투자하는 부분은 다름 아닌 걷기다. 걷기 괜찮은 날씨면, 나는 기꺼이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걷는다. 기분이 가라앉거나 운동을 해야 할 것만 같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일부러 마음먹고 걷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걷기는 그 기능과 무관하게 걷는 것이다. 마치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필요한 것은 조급하지 않은 마음과 두 다리뿐이다. 계획이나 목표는 여유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사치스럽게 걷기 위해서는 목적지도 시간도 상관없이 발길 가는 대로 따라야 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머릿속이 텅 비기 시작하면서 뇌는 모든 감각을 받아들인다.


산책 코스는 그날그날 다른데 해와 바람이 더할 나위 없이 좋거나 힘이 날 때는 왕복 한 시간 내외의 거리로, 바쁘거나 힘이 없는 날에는 작게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 가슴이 답답할 때는 바다를 향해 뻗은 4차선 도로로 걸어 내려가고, 작은 예쁨을 발견하고 싶은 날엔 구불구불 좁은 동네 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기본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집을 나서지만 그것을 빼야 하는 구간이 있다. 새들이 지저귀는 큰 나무가 많은 곳, 내 발소리까지 들리는 조용한 작은 길. 새들의 지저귐이 연인을 부르는 세레나데일지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삼엄한 경고일지 한낱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으나 그 소리만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것도 없어서 놓치지 않고 꼭 들으려 애쓴다. 그렇게 걷다가 차들이 쌩쌩 달리는 큰 길로 나오거나 급경사의 언덕이 나타나면 다시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지속할 힘을 낸다.


내 걷기 생활에는 또 하나 고급 옵션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건 무려 배경이 제주도라는 점이다. 열정의 뚜벅이인 반면 동네밖에 모르는 바보이기도 해서 활동 반경은 좀 한정되어 있으나 어찌 됐건 남들은 비행기표를 사거나 뱃삯을 내고 오는 제주를 나는 마르고 닳도록 거닌다.

질리도록 보는 야자수나 귤밭, 동백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 맛집 앞에 길게 줄을 선 관광객들을 보면 고가의 수집품을 모아둔 장식장 앞에서 별것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집주인처럼 속웃음이 난다.

“어머! 돈 내고 들어가지 않아도 될 뻔했네!”

관광지 주변의 산책로를 걷다가 어느 관광객의 탄식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는데, 내가 봐도 탁 트인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한 관광지 입구 옆의 산책로야말로 보물 같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런 보물들은 보통 정처 없이 걸을 때 우연히 발견되기 마련이다.  


관광지 입구 옆 공짜 명당!



사실 시원한 바다보다 돌담, 지붕, 귀여운 마당들을 구경하는 게 더 좋다. 



커다란 팽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아둔 낡은 의자, 마당이 훤히 보이는 낮은 돌담, 빨랫줄에 널린 테왁과 잠수복, 키 작은 귤나무들과 꺽다리 야자수, 언덕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낮은 건물들 위로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 나는 걸으며 이 귀한 풍경들을 야금야금 주워 간다.

서귀포를 내 집 앞마당처럼 거니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지만 사실 나는 내가 있는 곳 어디든 걷는 즐거움을 잘 발견하는 편이다. 걸으며 마주하는 풍경들은 사실 삶의 모든 것 같다. 남루한 집도 복잡한 길도, 큰길의 바삐 달리는 차와 느린 걸음의 노인도… 모든 삶이 길 위에 있으니 나는 매일 길 위에서 짧은 행복과 슬픔, 희망과 숙연함을 느낀다.


걷다 보면 나무와 열매, 사람들의 복장이 번쩍이는 전광판처럼 물리적인 시간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똑같은 것을 보고도 내 안의 생각들이 미묘하게 달라져서 ‘요즘의 나는 이렇구나’ 하고 내 내면의 시기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걷는 일은 쓰는 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다 보면 한결 가뿐해지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 복부에 들이차는 신선한 공기에 마음도 조금 싱싱하게 살아난다.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그것을 대하는 마음은 조금 달라지는 것이다. 

근심을 곱씹으며 걷기 시작해도 자꾸만 동네 할머니 보행 보조차에 달린 핑크색 곰돌이 열쇠고리에, 앙증맞은 산딸기 몇 알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면 그런 일이 있었나 싶고, 골치 아픈 일들도 신발 밑창 아래 꾹꾹 눌린 채 종잇장처럼 얇아지고 만다.  


얼마 전에는 한 열흘 간 난데없이 발바닥이 쿡쿡 쑤셔서 고생했다. 이렇게 내 사치스러운 취미를 빼앗기고 마는 걸까 어찌나 심란했던지.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괜찮아졌다. 안도의 한숨 뒤로, 목적 없는 긴 산책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그리 쉽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오늘도 운동화에 발을 꿰고 모든 것의 목격자가 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사람들을 본다. 할머니의 느린 걸음을 보고, 가게 앞 테라스에서 물청소하는 사장님의 씩씩한 몸짓을 본다. 각자의 리듬으로 사는 사람들. 어쩐지 ‘질주’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오토바이 뒷면에 붙어 있는 ‘초보운전’ 문구를 보고 웃기도 한다. 그렇지, 제 아무리 광속의 아이콘이어도 초보 시절은 있어. 그런 생각을 쓸데없이 이어 붙이며 용기를 얻는다. 일 년 내내 온갖 작물을 심고 거두는 부지런한 파란 지붕 할머니의 밭을 지날 때면 제철 작물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는다. 지금은 파와 배추 따위가 빽빽하게 심겨 있는 걸 보니 곧 김장철이 다가오나 보다.


손에 든 것 하나 없이 걷는데도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조금씩 내 안이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아침부터 맹렬히 비타민 D를 내뿜는 햇빛도 내 것, 살짝 더울랑 말랑할 때 불어오는 실바람도 내 것, 콘크리트 사이로 피어난 애기꽃도 다 내 것이다. 날마다 미세하게 색과 모양을 달리하는 나뭇잎의 큐레이션은 또 어떤가. 모두 걷는 자의 몫이다.


길에는 모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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