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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08. 2023

그럼 드라마가 안 되잖아

사내에서 네 남녀가 엇갈리는 멜로드라마를 요즘 열심히 보고 있다. 

오해하고 어긋나고 잠깐 설레고 또 삑사리가 나버리는... 약간 진 빠지는 수목 드라마다. 안 그래도 목요일쯤이면 사람이 좀 지루하고 피로해지지 않나. 그런데 이 드라마가 거기에 한몫 더하고 있다. 

시청자인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얘 맘도 알고, 쟤 맘도 아니까 자꾸만 어긋나는 주인공들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뭐 극이라는 게 갈등과 시련이 있어야 쌍방 애정 확인 단계에 카타르시스가 팡팡 터지는 거라지만 이 드라마는 좀 심하지 않나. 한 걸음 걸을라치면 발을 걸고, 보글보글 밥 좀 끓을라 치면 재를 들고 대기 탄다. 

지난주 목요일에도 급체한 듯 답답한 속과 두통을 선사하며 끝났다. 때마침 건조기 종료음이 명랑하게 울렸는데, 한숨을 푹푹 내쉬며 빨래를 가지러 가는 남편 등이 어찌나 웃기던지. 


이 드라마 말고도 요즘 드라마 볼 때마다 자꾸만 반복하게 되는 남편과의 대화 패턴이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니, 미안하다고 열 번 말했으면 이제 좀 받아주면 안 되나?"

"그럼 드라마가 안 되잖아."


"저렇게 피하지만 말고 당신이 좋지만 받아줄 순 없는 이유를 솔직히 말하면 안 되나?"

"그럼 드라마가 안 되잖아. (분량이 안 나오잖아.)"


"아니, 배달을 굳이 직접 해야 하나. 그럼 들키잖아!"

"안 들키면 드라마가 안되잖아."




그렇다. 

우리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드라마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오해를 오래 묵히고, 빙빙 돌려 말하고, 뻔히 들킬지도 모를 바보 같은 행동을 해야 서사가 생기는데 말이지. 꽁기한 기분을 서로 가지고 있으면 반나절도 괴로운 나. 남정네의 가슴에 불 지를만한 바보짓은 감도 안 오고, 냉장고에 반찬 한 번에 집어넣으려다가 우당탕 다 떨어뜨리는 바보짓만 잘하는 나.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드라마스럽지 않은 나. 그래서 적당히 괴로운 감정을 품고 드라마를 본다. 



제발 내게 사이다를 줘. 냉수라도 줘...



그래도 열심히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제정신으로 사는 것은 아니므로. 삐끗하고 망설이고 도망치고 바보짓을 하면서 살기도 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에구구 함께 안타까워하며 어머 어머 함께 황당해 하며 또 주인공을 열심히 응원하며 본다. 허들을 넘고 넘은 사람이 결국에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제 다 읽은 문보영의 <일기시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미워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요즘 내게 드라마가 그런 느낌이다. 요리조리 입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 발을 걸고, 발에 걸리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파하고 치유해 주는데 어찌 애틋한 감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모쪼록 나의 답답한 수목드라마가 사이다까진 아니어도 매실차 정도의 결말은 던져주기를 바란다. (이번 주 막 내림.)



내게도 드라마 같은 일이 생길까. 어떤 드라마가 생길 수 있을까. 

학부모들의 암투? (아는 엄마가 없어서 안 됨) 불륜? (남편과 클라우드 공유되어 있어서 안됨) 모녀간의 갈등? (내가 맨날 져서 견줄 수 없음) 

서귀포 끄트머리의 작은 마을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조용한 생활자 본인은 열심히 궁리해 본다. 앗. 지난주 월요일부터 시작한 다이어트에는 약간 드라마적인 요소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떡볶이라는 시련을 던져주는 것 어떨까.내 옆구리에도 딱히 드라마틱한 커브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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