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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01. 2024

그럴 땐 고등어를 치트키처럼 꺼내 먹어요

오후 네시쯤 되면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이 낀 것처럼 답답하고 막막해진다. 뭘까. 뭐가 머리만 닿으면 잠드는 단순한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그건 바로 잊지도 않고 또 오는 각설이 같은 녀석! 저녁 메뉴 고민이다. 주부가 되어서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상을 차렸던 우리네 엄마들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요즘에는 워낙 배달에 포장에 반조리 제품까지 선택지가 많지만, 30년 전 엄마는 없는 살림에 매일 얼마나 궁리를 했을지 짐작도 안 간다. 혼자 살거나 부부 둘이 산다면 좀 대충 때울 때도 있겠지만 한참 크는 아이가 있다면 그러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이런 고민은 전국 공통인지 늦은 오후쯤 맘카페에는 "오늘 저녁 뭐 드시나요?" "저녁 메뉴 공유해 보아요~" 따위의 글들이 올라오곤 한다. "닭곰탕에 비빔밥이요!", "콩나물 어묵 김치 넣고 칼칼하게 국이요~" 메뉴 선정은 물론 이미 밑준비까지 마친 부지런쟁이 엄마들이 정갈하고 푸짐한 식탁이 절로 그려지는 댓글을 단다. 댓글만 봐도 똑소리가 나는 살림꾼들이다. 말끝도 경쾌하다. 느낌표에, 웃음 표시에 여유가 묻어난다. 재미있는 것은 나처럼 오후 대여섯 시가 되도록 안갯속을 헤매는 이들의 댓글. 아직도 고민 중이라거나 뭘 하긴 해야 하는데 누워 있다거나 대충 시켜 먹겠다는 댓글에는 보통 '...'이나 ㅠㅠ가 달려있다. 저녁메뉴라는 악령에 시달리고 있음이 확실하다.


냉장고를 아무리 째려봐도 답이 없을 땐 냉동칸을 슬며시 열어 깊숙이 잠들어 있는 고등어를 꺼내본다. 나는 마트에서 여러 팩 들어 있는 냉동 고등어를 사서 항시 쟁여두고 있다. 안개가 가득한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 고등어는 밖에 나가 먹으면 참 맛있는데 내가 굽긴 싫은 대표적인 메뉴다. 비린내도 싫고 기름기가 많아서 미끌미끌한 것도 싫고 집안 가득 찬 냄새도 싫다. 고등어 포장을 벗기기 전 라텍스 장갑을 껴서 손에 비린내가 배는 것을 원천차단한다. 고등어 등 쪽에는 오징어 껍질처럼 얇은 막이 있는데  그걸 벗기면 비린내가 덜 난다고 해서 물에 씻으면서 껍질을 벗겨낸다. 자글자글 기름에 구워지는 생선 냄새를 프라이팬 앞에서 뒤집어쓰고 나면 나도 고등어가 된 기분이다.


나는 열외로 치고, 남편이나 아이가 열렬히 고등어를 원하느냐 하면 딱히 그것도 아니다. 그저 무쳐둔 콩나물처럼, 조미김처럼 밥과 곁들일 반찬으로 그럭저럭 먹을 뿐이다. 오늘은 고등어가 특별히 먹고 싶다거나 그런 정도의 메뉴는 아닌 것이다. 나도 굽기 싫고 가족들도 딱히 즐기는 메뉴가 아닌데도 주기적으로 식탁에 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뭘 먹을지 모르겠고 일단 굽기만 하면 완성되며, 영양가도 있는 데다가 심지어 가격도 저렴하다는 것.


먹기 전에 포장채 물에 담가 해동하면 고마운 고등어는 20분도 되지 않아 스르르 녹아준다. 압축팩을 뜯고 잘 씻은 후 키친타월에 물기를 닦고 소금 간을 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주면 끝! 오늘의 메뉴를 듣고 ‘그저 그런 반찬’ 이로구나 시금털털해하던 아이는 막상 고등어 굽는 고소한 냄새에 흥얼거리며 식탁으로 온다. 고등어를 먹지 않을 생각으로 내 몫의 찐 양배추와 알배추, 그리고 쌈장을 꺼내두었더니 아이는 배추에 고등어와 쌈장을 올려 야무지게 먹기 시작한다. 할머니 입맛을 닮았는지 비린내에 강한 녀석은 흰 살보다 다소 비린 갈색 부분을 좋아한다. 남편과 나는 잘 먹지 않는 부분이다. 밥그릇을 다 비운 후에도 배춧잎에 쌈장을 찍어 푸드 파이터처럼 먹는 아이를 보고 우리는 웃음이 터지고 만다.


굽길 잘했네.

고등어보다 쌈장을 더 많이 먹은 것 같지만 그래도 잘했네. 매일 악령 같은 저녁메뉴 고민에 시달리지만 매일 저녁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가족 모두가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함께 둘러앉을 것이라는 희망. 잊지도 않고 돌아오는 저녁 식탁은 얼마나 소중한가. 또 순식간에 배도 채워주고 영양도 채워주는 고등어는 얼마나 고마운가.

식사를 마치며 일상은 참으로 고등어 같은 것이로구나 생각한다. 매일매일 돼지갈비나 회 같은 스페셜한 일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 가성비 좋고 몸에도 좋은 무난한 한 끼가 우리에겐 더 자주 필요하다. 싫어하는 비린내를 입고 식구들과 소소한 일로 피식거리며 식사를 마쳤더니 [좋은 하루]라고 써진 도장이 꽝 찍히는 것 같다. 좋은 것 싫은 것 불편한 것 안락한 것들이 두루두루 반죽된 하루가 저물어간다. 인생엔 그저 그런 반찬 같은 날들이 더 많다. 얼마나 즐겁게 맛있게 먹느냐는 둘러앉은 이들의 몫이다. 고등어 같은 시간을 조금 더 충만히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잊지 말자. 저녁메뉴 악령에 시달릴 땐 냉동실 깊숙이 자리한 고등어로 퇴마 한다!

날림 살림꾼의 팁을 보태자면 치트키는 너무 자주 남발하면 가족들이 물려서 더 이상 먹지 않을 수도 있다. 주기를 봐가며 사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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