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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08. 2024

그릇된 자신감이 그릇을 깬다

우리 집엔 비싼 그릇이 없다. 무엇이든 와장창 깨버리는 와장창 씨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3인 가족 중 어린이가 한 명 있으니 왜인지 그쪽일 것만 같지만 편견이다. 와장창 씨는 이 집에서 '엄마'와 '아내'를 맡고 있는 나니까. 어린이는 다행히도 차분하고 신중한 아빠를 닮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정 주기가 지나 식기가 성한 게 없어지면 이케아나 다이소에서 싸고 적당한 것으로 사다 나르는 것이 우리 집 루틴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마이너스의 손과 급한 성격의 콜라보로 많은 것을 파괴해 왔다. 어릴 때는 주방 물건을 만질 일이 많지 않아서 그릇을 깬 적은 별로 없었지만 마이너스의 손이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희한하게 내 손이 닿는 전자기기는 (오빠의) CD플레이어부터 (오빠의) 노트북까지 맛이 가곤 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이모네 집 장식품도 망가뜨렸다. 난 그저 어여뻐서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떨어뜨리고, 모르고 밟고, 물을 쏟으며 벌인 사고들이 누적되자 내가 친 사고가 아님에도 모든 파괴의 주범은 나로 몰리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양심은 있었는지 누명을 써도 딱히 억울하진 않았다.


엄마에게 하여튼 덜렁거린다는 면박을 받으면서 자란 나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다양한 파괴 행각을 벌이고 있다. 좋든 싫든 살림살이를 만지는 처지가 되었으니 우리 집 그릇들이 주기적으로 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설거지 중에 그릇이나 컵을 놓쳐 깨는 일도 가끔 있고, 국그릇 밥그릇에 이 나가는 일은 다반사다. 아이가 학교 도자체험에서 만들어온 소중한 국그릇까지 끝부분을 살짝 깨뜨려서 며칠이고 사과한 적도 있다. 최근에는 아이가 일본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 소중히 챙겨 온 마리오 모양의 도시락 데코픽도 댕강 부러뜨렸다. 이런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어린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는다. 체념한 눈빛에는 '엄마가 또...'라고 쓰여 있다.


나라고 이러고 싶은 건 아니다. 에잇! 될 대로 돼라! 와장창 쨍그랑!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릇을 닦다가 미끄러져 놓치고, 조금 세게 내려놓는 바람에 금이 가고 그러는 새에 살림살이는 너덜너덜해진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조심성'이 부족한 것이다. 손이 야무지고 차분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한심할 것이다. 왜 저렇게 우당탕탕 하는 걸까. 왜 저렇게 유리를 살금살금 다루지 않는 걸까. 이쯤에서 와장창 씨가 변명을 해 보자면, 내게 살림살이를 조심조심 다루는 것은 걸음이 빠른 사람이 의식적으로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조금만 생각이 다른 데로 가 있거나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면 원래의 촐싹 맞은 걸음걸이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그릇을 깰 만큼 깼으면 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와장창 씨. 글을 쓰다 보니 어쩐지 한심해서 와장창 씨를 모른 척하고 싶어 진다.




성격이 급해 벌어지는 이 와장창 사태는 대부분 빨리빨리, 효율적으로 집안일을 끝낼 수 있다는 그릇된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식기세척기에서 그릇을 꺼낼 때 포개질 수 있는 만큼 높이 높이 그릇을 포개 옮기거나 스피드 게임을 하듯 설거지를 끝내는 것에서 나는 이상한 뿌듯함을 느낀다. 건조가 끝난 빨래도 두 번 옮기고 싶지 않아서 꾸역꾸역 바구니에 탑을 쌓아 거실로 가져온다. 문제는 효율과 일의 완성도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릇을 빨리빨리 닦고 정리하다 보면 이가 나가기 일쑤고, 빨래도 턱밑까지 탑을 쌓아 가져오다 보니 양말 한 짝씩은 늘 베란다에 처연히 떨궈져 있다. 살림을 숙제라 생각하다 보니 방학숙제 하던 어린 시절의 날림 일기처럼 호로록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리라. 십 년을 해도 집안일의 과정 과정을 소중히, 차분하게 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뭐 하나 파괴되어 나갈 때마다 '나는 왜 이럴까'하는 자괴감이 들지만 또 지난번 실수와 똑같은 짓을 하고야 마는 나.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라고. 아인슈타인의 명언이 살벌하긴 하지만 '어이! 아인슈타인 씨, 당신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쌓이는 집안일에 대해 뭘 알아?' 하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게 집안일은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부지런히 먼지는 쌓이고 다 쓴 컵도 쌓이기에 서둘러야 한다. 안 그러면 집안일에 잡아 먹히는 수가 있다. 날림 살림꾼에게도 지론이 있다면 생활은 간단하게 하고 더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집 안에 널브러진 일들을 얼른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와 일을 그르친다. 이런 날림 살림꾼에게 과연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아직도 살림과 데면데면한 10년 차 주부는 오늘도 다짐한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설거지한 그릇의 물기를 닦으며 콧노래를 부르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조금 더 여유 있게 마주해 보자고.


오늘 아침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기를 돌렸으나 역시나 와장창 이슈가 발생하고 말았다. 청소기를 팍팍 돌리다 화분에 부딪혀 화분받침의 이가 나간 것. 바닥에 떨어진 토분 가루를 훔쳐내고 슬쩍 먼산을 본다. 십 년이면 저 산도 변하고 나도 변할 수 있을...까? 날림 살림꾼의 불쌍한 살림살이는 오늘도 아슬아슬한 수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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