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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18. 2019

피식하다 숨죽이다 숙연해지는 팔색조 칼럼의 향연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_ 김영민

마른땅 흙먼지 날리듯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쏟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볍고 경쾌한 리듬으로 인생의 묵직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다. 젖은 솜처럼 지치고 무겁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삐져나온 실밥 당기듯 사소하게 시작해 심각한 이야기의 올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풀어내는 사람이 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 김영민 교수를 감히 평하자면 후자의 사람이 아닐까. 


멋진 책을 읽었다.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칼럼 모음집이다. 

'칼럼 역주행', '칼럼계의 김태리' 등의 평으로도 충분히 궁금했지만 사실은 어떤 분이 올려둔 몇 개의 밑줄을 읽고 '아 어쩜 이렇게 경쾌하고 즐겁게 일상의 너절함을 말할 수 있는가'하며 이미 반해버렸던 것이다.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해 학문과 정치, 영화, 삶과 죽음… 큰 주제들을 아우르는 글들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저자만의 생각과 지식으로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경박한 소리로 깔깔거리다가 칼같이 날카로운 글에 숨죽이다, 가슴이 내려앉듯 무겁기도 잠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글이 너무 맛있어서(?) 읽는 동안 범접할 수 없는 글쟁이의 내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정말 신나게 썼군! 하는 리드미컬한 글에 독자도 같이 들썩이게 된다. 


특히 진지충이라는 욕을 먹으면 삶을 포기하고 싶어 질 것 같은 ‘곧 죽어도 유머파’라면 책을 끌어안고 이 책을 산 자신을 몹시 우쭈쭈 하고 싶어 질 것. 물론 유머 코드라는 게 각기 달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으나 본인처럼 비급 유머, 풍자를 좋아하며 세상 보는 눈이 조금 경사지게 달려 있다면 대만족 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전 영화나 정치 이야기에서 어려워 잘 읽히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라면 국물에 밥 말아먹듯 후루룩 씹는 둥 마는 둥 책장을 넘길 뻔했으나, 이런 독자를 예상이라도 한 듯 사랑스러운 웃음 지뢰가 곳곳에 매복되어 있어 꼭꼭 씹어 먹었다. 


삶에 지치고 위의 것들(?)에 질리고 밥벌이에 고단할 독자들을 위해 김영민 교수의 영민하고도 뻔뻔한 유머집(이라 쓰고 칼럼집이라 부른다)은 정기 출간되어야 옳다고 본다.


+ 쓰고 보니 서..서평 아니, 찬양글..




<밑줄 긋기>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_ 23p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낸 인생에 불과하다. 태어난 이상, 성장할 수밖에 없고, 성장 과정에서 상처는 불가피하다. 제대로 된 성장은 보다 넓은 시야와 거리를 선물하기에, 우리는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_ 37p


억울했다. 항변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난 직장에서 당신 같은 사람을 일상적으로 보고 살며, 미국에서는 여자 대학이 직장이었다. 그리고 배우 전도연을 닮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왜 날 바바리맨으로 취급하는가. 나를 추리닝맨이라고 하는 건 참을 수 있다. 사……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를 바바리맨으로 간주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난 바바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항변을 포기하고 그냥 영화를 보았다. _98p


어떤 폭력적인 경험은 때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를테면 식민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던 한국이 그렇다. (…) 원초적 폭력이 한국인에게 떨치기 어려운 공통의 숙제를 부여했으므로, 한국인은 그 숙제를 하며 현대사를 소진해야 한다. 세밀화를 배우고, 석판화를 수집하고, 시집을 천천히 고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한다. _ 155p


정신 승리에만 열중하다 보면, 객관적인 현실이 슬그머니 다가와 백허그를 한다. 이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잠시 멈춰서서 바닥난 은행잔고를 바라보세요. 정신 승리를 한다고 해서, 길 잃은 지폐가 방문을 두들기며, ‘여보세요,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당신 지갑 속에 하룻밤만 재워주세요’라고 하겠어요? 이불속에서 오늘은 금요일이라고 10번 외쳐도, 이불 밖의 현실은 여전히 월요일이죠. _225p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 _ 318p


(칼럼을 통으로 읽어야 맛이 나는데, 문단을 따다 쓰려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침에는죽음을생각하는것이좋다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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