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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y 24. 2019

줄리아나 도쿄, 한정현

때마다 읽기 _ 조용한 밤에 차분한 마음으로 읽기 좋은 책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선택할 수 없는 불운의 굴레 속에서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줄리아나 도쿄>


올해 들어 읽은 소설 중 제일 좋았다.

(소설 몇 권 못 읽은 건 비밀...)


이야기는 데이트 폭력을 겪고 자신을 숨긴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한주와 유키노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지켜주며 지내던 어느 날, 갑작스레 유키노가 사라지고 한주는 그가 위험에 처했음을 직감한다. 유키노를 구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겹쳐진다. 한주와 유키노의 이야기, 유키노의 엄마 이야기, 유키노를 돕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알아낸 학자(김추)와 그의 어머니 이야기...

모두 사회의 구석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던 노동자와 그의 자식들, 주어진 상황에 떠밀려 살 수밖에 없던 이들, 그럼에도 “너의 선택이다”라는 사회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던 이들의 이야기다.


가슴이 저릿하게 먹먹한 이야기가 과장된 감정 없이 담담하게 펼쳐지는 줄리아나 도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애잔하여 한 번씩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한주의 이야기, 유키노의 이야기, 유키노의 엄마 이야기... 이런 식으로 여러 인물들의 챕터가 나눠지고 이어지는데 그 결이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일관성이 있어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감정과 행동이 한 센트의 퍼즐처럼 들어맞았다. 고심하며 얼개를 만들어 냈을 작가의 수고가 느껴진다. 이 긴밀한 관계 설정에 감탄하며 다시 한번 읽고, 그러면서 각 인물들의 키워드를 적어 정리해보기도 했다.


내용은 다소 무겁고 우울하지만, 인물들이 서로 위로하고 보듬는 마음만은 반짝하고 빛이 난다. 문장들이 아름다워 읽는 동안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 주었다.




<밑줄 긋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주는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에 제일 먼저 없어지는 건 소리’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녀가 공부했던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여성 노동자들은 온몸을 던져 말하려 했다.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작업복을 벗어버리고서.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녀들은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만다. 겨우 낸 목소리가 또 다른 폭력으로 사라졌다는 뜻이다. 열악한 노동 환경과 형편없는 저임금에 항의하며 알몸으로 거리에 나섰던 여성들의 그 시위는 단 한 장의 사진으로조차 남지 않았다. _94p

 

“한주 씨,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눈은 쌓여가면서 녹고 있었다. 반짝이는 결정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분명하게 고르거나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삶에는 훨씬 많습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 인생에는 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_103p

 

유키노가 느끼기에 자신의 나라는 어떤 면에서든 대부분 잠잠했다. 그것이 평화로운 고요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비명을 숨기기 위해 입을 막고 있는 것과 같은, 폭발 직전의 고요함이라는 건 역시나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_ 113p

 

“밝으면 좋잖아. 밝으면 저거 안 켜도 되잖아.”

그때 두 사람은 땅에 창문이 반쯤 걸린 주택의 반지하에 살았다. 유키노가 가리킨 형광등을 보던 어머니는 한번 더 그를 끌어안았다.

“그 대신 옷이 더러워도, 마음이 부끄러워도 숨을 곳이 없어.”

유키노는 팔을 풀어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물이 고인 눈동자 안에 자신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_ 154p

 

‘뒷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얼굴 같아.’

유키노는 가끔 그 말을 생각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내내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한주가 이해하냐고 되묻지 않아서 더 좋았다. _ 172p

 

… 슬프지 않다는 뜻을 결코 아니었다. 다만 원래 흘러가던 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도 한꺼번에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살다가 떠난 것이지 이 세상에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추는 사람들이 위로차 해주었던 말, 산 사람은 빨리 잊고 살아야 한다는 말에 악의가 없음을 잘 알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_2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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