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관찰 일기
요즘 서귀포는 잔뜩 시무룩이다.
아침 잠깐 해가 난다 싶다가도 다시 우중충.
수묵화처럼 짙고 옅은 먹구름들이 은근슬쩍 내려앉고 습기를 머금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제주는 비 오는 날이 많다지만 이런 날들이 이어지면 몸도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다. 흐린 날엔 아이고 허리야 무릎이야 하며 난데없는 신체부위 출석체크를 한다. 반짝 해 나는 날엔 얼른 동네도 좀 돌며 산책을 하고 킥보드를 대령해놓고 꼬맹이 대장님의 어린이집 하원을 기다리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엔 선선한 기운에 할머니처럼 가디건을 여며 입고 커피를 홀짝인다. 온통 비가 퍼부은 직후의 물안개 가득한 길을 거닐면 어항 속에 있는 기분이 들만큼 습하다.
참, 요즘 쟁여둔 도시락 김이 구부러지느니 부러지고 마는 대쪽 같은 바삭함을 잃어버리고 무겁게 흐늘거리는 것도 요놈 습기 때문인듯 하다. 아무튼 습기 때문에 서귀포를 떠나는 사람도 있다 하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녀석일지 궁금하다. 잠깐만 한눈팔면 탐스럽고 부지런한 곰팡이꽃이 피신단다. 8월 말쯤이면 이곳 탐라 생활 일기에 "졌다.." 또는 "그까짓 습기" 이 둘 중 하나로 표현할 수 있겠지. 대체로 인내가 부족해 겨울에 춥다 춥다 여름에 덥다 덥다를 입에 달고 사는 내게 습기라고 버티기 쉽겠냐만은.
제주의 장마는 보통 6월 20일 무렵에서 7월 초까지라는데 끄물끄물한 날들이 이어지는 것 보니 이미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네 엄마들은 제습기가 필수라며 겁을 주지만 우리는 대형 튜브와 서핑스쿨 따위나 알아보며 에어컨 제습기능으로 버틸 때까지 버텨보고 있다. 돈도 없고 철도 없는 제주 새내기들은 아직까진 즐겁기만 하다.
오늘은 보슬비가 종일 내려 비를 좋아하는 아이와 한 시간 넘게 밖에서 놀았다.
아이가 물웅덩이를 첨벙거리고 맨발로 젖은 땅을 비비는 동안 봄을 지나 푸르고 무성한 계절로 향하는 나무와 꽃들을 구경했다.
초여름, 고개를 들어 나무들을 바라보면 열매들이 으쌰 으쌰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봄부터 서서히 여물어가던 매실은 벌써 빨갛게 익어 제풀에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이와 그나마 푸른 매실을 따다가 매실장아찌와 매실주를 담갔는데 계획도 정확한 방법도 없이, 가자! 따자! 우당탕탕!!!으로 진행된 일이라 결과가 어떨지 기대 아주 조금, 두려움 아주 많이다.
지난달만 해도 아찔한 귤꽃 향기로 온 동네를 흔들어 놓던 귤밭엔 조랑조랑 작은 귤들이 달렸고, 못 본 사이에 모과나무에도 꼬마 주먹 같은 모과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잎이 마치 깻잎 같은 모양새라 우리 꼬맹이에게 억울하게 '깻잎 나무'라 불리던 수국도 소담한 꽃송이를 보란 듯이 피어올렸다. 도저히 무심코 지나갈 수 없는 향기의 치자꽃이 집 앞에 피어 발길을 잡아 끈다.
서귀포에 살면서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 체감한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 다른 풍경.
고개를 돌리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꽃이 피어 있고, 열매가 열리고 나무의 색들이 달라져있다.
어제는 별을 보고 싶다는 아이와 밤 산책을 했다. 아이는 어린이집 외부 복도 천장에 제비가 집을 지었고, 거기서 자꾸만 똥을 싸 선생님들이 제비집 밑에 박스 하나를 대놓았다고 깔깔 웃었다. 똥싸는 제비를 흉내내며 궁댕이를 뿌웅-하고 내미는 아이의 표정이 익살맞다. 비구름에 가려 아쉽게도 별들은 보지 못했지만 머리맡에 있는 듯 유난히 낮고 커다란 보름달을 보며 우리는 열심히 걸었다. 오감이 즐거운 서귀포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