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아이의 어린이집 방학이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아이의 날들이 아쉬워 뭘 해야 또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남편과 나는 방학 전부터 고민했다.
호캉스를 할까, 캠핑을 할까 하다가 우도에 가기로 했다.
제주도에 이사 온 후 딱히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어디를 다녀본 적이 없다. 사실 차로 조금만 나가도 바다와 숲이 있으니 발 닿는 곳 어디든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고 싶었다. 배를 타본 적 없는 아이도 무척이나 좋아할 것 같았다. 숙소를 예약하고 우도의 예쁜 바다 사진을 들여다봤다. 아이는 어린이집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방학 때 배 타고 여행을 간다고 했단다.
신나는 방학이 시작되었고 우도 가기 전 날 차는 심상찮은 소리와 함께 길 한복판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진단명: 기어 변속기 사망
차는 150만 원의 수리비와 함께 정비소에 맡겨졌다. 그것도 공휴일과 주말이 끼어 며칠을 차 없이 지내게 되었다. 렌트를 해서라도 우도에 갈까 어쩔까 하다가 이미 반나절이 지나가고 그렇게 우리는 집콕 방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우선 집 앞 실내 수영장으로 향했다. 동네 체육관은 여름 맞이로 유아풀을 개장, 운영하고 있었다. 첨벙거리며 놀고 나와 젖은 머리로 핫도그도 사 먹고 하릴없이 동네 작은 길들을 걸었다. 채도가 낮아진 하늘 아래 슬그머니 가을 냄새를 들고 온 바람이 우리를 감쌌다.
한 사나흘을 그렇게 지냈다. 수영장엘 가고 집 앞 놀이터에서 비눗방울을 불었다. 베란다 바닥에 5 살 딸과 마주 앉아 각자의 발톱에 알록달록 색을 칠했다. 며칠을 집에 있자니 간식도 동이 나 에어프라이어에 라면을 구워 먹었다. 아이는 오도독오도독 설탕 뿌린 라면 과자를 깨물며 알록달록한 발톱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아주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세 들어 살던 집엔 마당이 있었는데 엄마와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동네 화장품 가게에서 팔던 싸구려 매니큐어를 바르던 기억.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년기의 몇 가지 선명한 장면들이 있을 텐데, 나의 그런 기억 중 하나는 엄마가 마당에 앉아 내게 빨간 매니큐어를 칠해주던 것이다. 따뜻한 볕, 작고 아늑한 마당, 파마머리 엄마 그런 아주 단편적인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면 마음이 묘하게 벅차오른다. 어떤 특별한 일보다 나를 보드랍고 달콤하게 안아주는 기억. 그런 것들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 아닐까?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행복은 늘 그런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하는 시간. 주고받는 눈빛. 함께 터뜨리는 웃음.
무엇을 해서. 어디를 가서.
어떤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이유 없이도 기억은 아주 사소한 일상을 찍어 남긴다. 노랗게 세월에 바랜 색을 입은 그 기억들은 언제든 문득 떠올라 온기를 더하고 간다.
아이는 방학을 보내고 거의 열흘만에 등원했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며 발톱을 칠한 것과 수영장에 다녀온 것, 집에서 색종이를 접었던 것을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떠올렸다. 아마도 즐거운 방학을 보낸 얼굴이다. 비록 우도에는 가지 못했지만 아이에게 그곳에 가고 안 가고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부모로서 '특별한 것'을 해주고 싶은 부담감이 생길 때가 많다. 하지만 이벤트는 가끔으로 족하다. 편한 마음으로 아이와 웃으며 일상을 보내는 것, 그것만큼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줄 방법이 있을까.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달콤하고 보드라운 기억이 꽤 많은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아주 거창한 육아 목표를 품어보는 개학 첫날의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