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제주 날씨는 요란한 가을맞이 장대비 특집이다.
이런 날 5세 아동과 함께하는 십여분의 등원 길은 그야말로 스펙터클 어드벤처.
쏟아지는 빗속에 우산을 집어던지고 헤헤거리기(영화 찍냐...), 물웅덩이에서 폴짝거리기, 달팽이 구경하기, 차가 지나가면 좁은 길 담장에 붙어서 기다리기... 쫄딱 젖는 것도 젖는 것이지만 원에 보내고 오면 하루가 다 간 것처럼 지치기 때문에 오늘은 후딱 준비시켜서 차로 출근하는 아이 아빠 편에 등원시켰다. 비몽사몽 하는 아이를 깨워 '빨리' 밥 먹어라, '빨리' 씻어라 노래를 불렀다. 고맙게도 아이는 그럭저럭 바쁜 엄마의 리듬대로 협조해주고 출근하는 아빠와 함께 등원했다.
적당히 바쁜 오전을 보내고 반찬 하나 해놓고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아침 일찍 정신없이 아이를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려 오후엔 많이 놀고 이야기하고 충분히 다정한 시간을 보내야지 하고 다짐했다. 하필(!!) 어린이집 앞에 위치한 편의점에 오늘도(!!) 들러 먹고 싶다는 킨더 조이 초콜릿을 사주었다. 비가 개인 선선한 날씨라 한들한들 손잡고 동네를 걷고 싶었지만 아이는 유난히 천천히 먹었고, 먹다 말고 다른 손님들을 구경하고, 초콜릿에 함께 들어있던 자동차 장난감을 이리저리로 굴렸다.
"빨리 먹고 우리 문방구 가자."
"우리 빨리 먹고 나가자. 좀 있음 또 비올 지도 몰라."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또 닦달의 탭댄스를 추고 있었다. 내 딴엔 아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산책을 하려던 것이지만, 의도가 어찌 되었던 자기만족에 조급증까지 더해진 아주 별로였던 처사였다.
간식도 먹고 물감놀이도 하고 샤워도 하고 저녁도 먹고...
나름의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니 벌써 잘 시간이다. 아이가 최대한의 꾀를 부려 시간을 늘리는 저녁 시간. 빨리 재우려는 자와 잠들지 않으려는 자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펼쳐지는 시간. 하루의 피로가 쌓인 엄마는 또 '빨리' 카드를 꺼내 든다.
"잘 시간이야. 치카하자."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더 이상 연령에 맞지 않는 시시한 퍼즐을 괜스레 펼쳐놓은 작은 등짝이 집요하게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다.
"이제 치카하고 잘 시간이야. 빨리 치카해."
아이는 자기가 맞춘 퍼즐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빨리'를 외치는 엄마가 서운해 잔뜩 시무룩한 표정으로 양치를 하곤 평소보다 빠르게 잠에 들었다.
그런데 왜일까.
아이가 빨리 자는 건 늘 땡큐인데, 오늘은 자는 아이 얼굴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빨리빨리를 하루 종일 외쳐놓곤 왜 빨리 잠든 아이를 보며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아직은 작고 보드라운 아이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빨리빨리 로봇은 몹시 미안해졌다. 어쩌면 '일과'라는 미명 아래, 아이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어른의 계획 아래 아이의 작은 등을 너무 떠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직 시간 개념이 없는 아이를 조금만 배려하고 충분히 설명하면 될 것을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작은 손을 억지로 잡아끈 것은 아닐까.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느라,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를 보느라 50개월에만 할 수 있는 귀여운 말과 사랑스러운 표정을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한노 유키오가 쓴 <빨리빨리>라는 동화책에는 그놈의 '빨리'에 질려버린 아이가 '빨리'라는 말을 잡아먹는 '천천히사우르스'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의 시간은 나와 다르다. 세세한 감각과 기억이 가득한 아이의 시간을 나도 지나왔다. 그것이 얼마나 풍성하고 밀도 있는 것인지 알면서도 아무렇게나 빨리 보내버리려 했던 내 마음속에 천천히사우르스를 들여놓고 싶다. 빨리라는 놈이 나오기도 전에 크릉-하고 잡아먹히게 말이다.
조금 더 느긋하게, 조금 더 기다려주기. 다시 다짐해 본다.
조심조심 온 힘을 다해 일어서면 꼴깍 침 삼키며 기다리고, 천천히 한 발을 디디면 손뼉 치며 좋아하던 아기 엄마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