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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고 향기롭게 Dec 16. 2021

군밤의 추억

아궁이 불에 구워 먹던 밤알들

초등학교 아니 그땐 국민학교 입학 전 우리는 언덕 위의 집에서 이사를 왔다. 새로 이사 온 집의 지붕은 초록색 얇은 강판이 처마를 지켜주었던 집이었다.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초록색 지붕 집 마냥, 그 집은 초록색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듯했었다. 마당도 넓고 수돗가 한편엔 오미자나무, 길 입구엔 무궁화나무, 마당을 돌아서 산 아랜 자두나무와 밤나무가 있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밤꽃을 피우며 자란 밤나무에 열매가 결실을 맺는다. 쩍 벌어진 밤송이마다 가을색을 가득 품은 밤들이 토실토실 매달려 있다. 나에겐 밤나무 아래에서 밤을 줍는 일이란 마치 길가다 돈 주운 거 마냥 신나는 일이었다.


뾰족 뾰족 밤송이 사이로 매끈하게 윤기가 반지르르 빛을 내는 알밤들은 줍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을 위한 아궁이 불이 지펴지고 굴뚝으로 뽀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부엌에서 서성이던 난 갑자기 '톡'하고 지붕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부엌에서 연결된 뒷마당으로 달려가 본다. 어김없이 알밤이 또르르 떨어져 밤송이들 사이에 있다. 그렇게 주운 밤들을 하나둘 모아 아버지 옆에 둔다.


저녁을 위한 군불이 지펴지고 장작이 뻘겋게 타오르는 순간 아버지께서는 낫으로 알밤을 칼집을 내신다. 그리곤 가장 잘 구워질 자리에 무심한 듯 휙 던져두신다. 난 옆에서 가만히 아버지의 모습을 눈에 담기 바쁘다.

잠시 후, 또 '톡" 또르르르 밤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김없이 난 또 어두워져 가는 밤나무 아래에 있다. 두리번두리번 밤알을 찾다가 이번엔 벌레 먹은 볼품없는 알밤이란 걸 알게 되었다.


다시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궁이 불속 알밤을 유심히 찾아본다. 아버지께서는 부지깽이로 알밤을 잘 익으라고 덮어 두셨기에 뒤적뒤적 까맣게 그을린 알밤을 찾기란 어렵진 않았다.

부엌은 저녁 준비로 한창 바쁜 시간이다. 마당으로 뛰어나간 난 잠시 후 아버지께선 이름을 부르신다.


쪼르르 달려가 보니 껍질이 까맣게 탄듯한 밤알은 김을 내뿜는다. 아버지께선 목장갑 끼고 손바닥으로 비벼가며 껍질을 까고 군밤 향 가득 내는 한 개를 건네주신다.


뜨거워 잡지도 못하는 난 옷소매를 끌어당겨 그 위에 군밤을 올려놓고 한입 깨물어 먹는다. 저녁 먹기 전 허기 달래기엔 이만한 간식도 없다. 뜨거움에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으면서 구수하고 달달한 군밤이 세상 맛있다.

먹거리가 많이 않던 시절, 간식거리 하나 생기면 얼마나 행복했단 말인가!


퇴근 후 근처 야채가게에 들러 콩나물이랑 두부를 고르다 알밤 한 봉지 눈에 들어온다. 구워 먹기 딱 좋아 보이는 크기다. 생긴 것도 맛있게 생겼다. 동글동글한 이 알밤을 에어 프라이기에 구웠다.

한 알 먹는 순간, 어릴 적 초록색 지붕 집에서 금방 떨어져 주워 구워 먹던 군밤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은 아궁이 불에 구울 수 없지만, 그때 그 감성 그대로 맛있게 내 곁에 있는듯한 군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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