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백수에겐 계획도, 약속도 없어야 하는 법이다. 월요일에서부터 매일 심심한 하루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어나서 밥 먹고, 운동하고, 밥 먹고, 영어 공부하고 뭐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하고 이것저것. 소소한 일탈을 해볼 요량도 있었지만 심심한 나날이 주는 행복이 더 좋았다. 운동과 공부에 몰두할 수 있고, 술자리에 불려 가서 주말이 삭제될 일도 없었다. 운동과 영어공부 시간 말고는 모든 순간이 나의 어처구니없는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갔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할 수 없는 건 안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할 수없는 건 사뿐히 무시했다. 모든 선택이 오직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무자비하게 복수를 성공한 킬러의 음흉한 미소를 내 얼굴에 박제시켰다.
내일은 오늘보다 날씨가 좋다고 빅스비가 그러더라.
'시민공원에 산책이나 가야지... 그다음은 어떻게 되겠지.'
그날 나는 권민재에게 선물할 책을 한 권 사고, 서브웨이 플랫+미트볼(+스위트 칠리, 소금, 후추) 조합을 뚝딱하고 나서 민재를 불러 길고 긴 술파티를 벌렸다. 그리고 그 책을 기억 저편으로 잊어 아니,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