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문제 삼지 않는 것.

by 탈고

강릉을 오고,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으로 시내를 나가는 날이라 오래간만에 워커를 꺼내 주섬주섬 신발장에서 신는데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좁쌀만 한 우박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했기에 우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냥저냥 버려진 거적때기 하나 주워 쓰고 샵까지 갔다. 하루가 걱정이었다.

우선 커피를 한잔 마시고, 그때서야 버스 노선을 수소문했다. 오래 동안 강릉에 머물렀던 해리 누나가 정보를 많이 주었다. 내가 머무는 강릉 사천은 예상보다 더 시골이었다. 버스는 하루에 많아야 10대 남짓이고, 대부분 1시간이 넘는 텀을 두고 운행했다. 시계를 보니 10분 후에 차가 한대 있어, 불이 나게 정류장으로 갔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1586313477620.jpg 저거 쓰고 왔다니까...


우선 한 번은 갈아타야 했고, 환승구간에선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날은 춥고, 슬슬 짜증이 나시 작했다.


꾸역꾸역 시내로 가서 밥도 먹고, 닭강정도 먹고, 시계도 고치고, 영화도 보고, 생필품도 사고하니 3시가 훌쩍이었다. 부산이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버스가 일찍 끊긴다는 해리 누나의 말에 걱정이 앞서 얼른 돌아가는 버스를 찾았다. 이번엔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도착했다. 운이 좋았다.

타지를 여행하는 것, 그것도 지역의 중심가를 돌아다니는 것은 설레는 일이지만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게 새롭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말투와 톤, 버스의 색과 노선도, 도로의 폭과 신호등의 모양, 건물의 높이, 거기에 스타벅스 아메 맛도 다르고, 맥도널드 양상추 색도 다르다. 이 모든 건 평범함이 주던 안락함을 서서히 무너트리는 촉매다. 멀리서 보면 사소하지만, 다르다는 사실 하나가 느껴지는 순간 날카롭게 나의 고정관념을 파고든다. 그럼 이전의 일상이 고정관념 덩어리였다는 사실이 불편 졌다. 어디든 다를 수 있다는 인정보다 왜 달라?라는 사실에 인정없이 짜증 나 버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불편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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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환승구간에 내리고 나니, 환승해야 할 버스가 이미 끊긴 이후였다. 이유는 중간에 막국수 한 젓가락 머어 보겠다고, 본래의 코스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뭐 어쩌겠는가. 막국수는 맛있었고, 메밀 전병까지 시킨 나머지 시간이 그렇게 흐른 것을. 아무튼 빼도 박도 없이 걸어야 했다. 약 1시간. 요즘 앱이 참 친절하다. 약 7400걸음을 걸어야 도착한다는 사시까지 알려주다니...

걸어오는 길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높은 건물은 없고, 밭은 드넓었으며, 개나리 핀 길과 그 옆을 흐르는 강, 그 강 위에 비친 햇빛과 낚시꾼 아저씨. 해가 지고 있었다. 바람이 아주 낮게 깔려 밭 위의 푸르른 것들을 훑은 다음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바람의 인기척이었다. 놓쳐버린 버스가, 일찍 끊기는 이 마을의 버스가 고마웠고, 그것을 문제 삼았던 조금 전의 내가 이상하리 만큼 못때게 느껴졌다. 없으면 없는 데로, 주어진 만큼만 살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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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크다고 하는 도시에 살고, 그 도시에서 정신없이 살아오면서 일상이 짜증이었던 것 같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30년 가까이 부산에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정해오며 살아왔더 던 탓일까. 나는 뭘 할 거고, 나는 뭐가 되고, 오늘은 어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회의는 그렇게 하고, 업무는 또 그렇게 하고, 내일은 뭘 입고, 모래는 그 일을 누구와 맞나 어떻게 끝내고 등등. 그러다 무엇하나라도 조금만 틀어지면 짜증이 났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내가 컨트롤할 수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틀을 만들고, 그 틀에서 조금이라도 삐저나가면 불안함과 짜증이 밀려와 스트레스가 되었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문제를 만들고, 틀리면 또 문제 삼았을까. 문제를 내고, 문제를 푸는 것도 나인데, 왜 그렇게 질문을 어렵게 내려고 안달 냈을까. 쉽게, 쉽게 질문했으면 되었는데 말이다. 100점이 아니어도 된다. 내가 문제를 내고, 내가 푸는 데 점수가 있을 리 없으니까.


정해진 건 단 하나도 없다. 내가 단정 지어 버리는 것들만 있을 뿐이다. 내일부터는 좀 더 단정 지어 버리는 일을 줄여나가야겠다. 문제를 문제 삼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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