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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Sep 04. 2023

보통의 도시에서

   무던한 삶이었다. 대학에 가라 해서 대학에 갔고, 등록금과 술값, 예쁜 옷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사이 쌓은 초라한 포트폴리오와 경험을 이력서에 적었고, 잡지사 등에 보냈다. 이력서 ‘열람’이라는 두 글자에 사람 마음이 어찌나 요동치는지. 기대와 긴장, 떨어져도 낙담하지 말자는 다짐과 그 다짐을 가볍게 꺾어버리는 초조함이 일상을 손쉽게 쥐고 흔들었다. 몇 달 동안 열람이라는 단어에 휘둘리다 보니 떨어졌다는 통보도 고마웠다. 연락조차 없는 회사들은 사귀자는 말에 잠수 타버린 썸녀처럼 밉고, 밉고, 아프게 했다. 



   소소한 회사들과 프리랜서 일을 전전하며 그저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너덜너덜한 번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출근했고, 회사 복지의 꽃인 맥심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를 켰다. 당일 업무를 체크하고 하나하나 해 나가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었다. 혼자 먹고 싶었는데, 그런 적은 없었다. 밥을 다 먹으면 곧바로 회사로 복귀해서 곧바로 일을 했다. 혼날 일이 있으면 혼났고, 회의가 있으면 이미 답을 정해 놓은 상사 앞에서 열심히 고민하는 척했다. 퇴근하면 자연스럽게 야근을 했고, 진짜 퇴근하면 별빛 없는 시커먼 밤하늘을 바라보며 지하철로 향했다. 



   네 정거장 거리에 월 45만 원의 작고 하찮은 방이 다른 누군가의 방들 사이에 힘겹게 끼어 있었다. 주소는 있었지만 집일 수 없었다. 고향 우리 집, 내 방보다 작은 원룸이었으니까. 그래서 주말엔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갔다. 집은 길바닥에 달라붙은 껌처럼 작고 초라했지만, 서울은 한없이 넓고 화려했다. 매주 다른 동네를 여행했고, 매주 갈 곳은 넘쳤다.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가서 인스타그램에 흔적을 남겼다. 잘살고 있다는 겉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좋아요’를 누르는 그 누구도 내가 어디에, 어떻게 사는지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사고가 났다. 구급차에서 응급실로, 중환자실로 그리고 6인실 병실로 옮겨졌다. 한 달 남짓 침대에 누워, 몽롱해진 손끝으로 인생 가장 밑바닥을 훑었다. 뇌신경 손상으로 반쪽이 마비된 혀는 단단한 자물쇠처럼 입을 걸어 잠갔고, 뱉어내지 못한 단어들은 찢어질 듯 팽팽해진 삶의 밑바닥으로 쉴 새 없이 추락했다. 가장 먼저 과거의 후회들이 내리 꽂혔고, 다음으로 미래의 막막함이 곤두박질쳤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는 나 말고 단연코 없었다. 



   꿈꾸던 삶이 지금의 삶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꿈이란 걸 현실 깊숙이, 어쩌면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숨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카로운 단어들이 노크하듯 밑바닥을 두드리니,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오랜만이지? 근데, 왜 이러고 사니?” 지금의 삶은 꿈꾸던 삶에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본인도 정확히 몰랐으니까. 왜 이러고 사는지. 왜 반복적인 하루하루를 당연하게 여기는지. 왜 남 눈치만 보면서 휩쓸리듯 사는지. 왜 자기답게 살아갈 시도조차 안 하는지. 왜 야근에 절어서 머리가 시커먼 밤하늘처럼 돼 버린 건지. 사고가 나서 그런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두 개의 삶은 완전한 대척점에 서서 힘겹게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뭘 하고 싶었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냐고! 지금의 삶이 질문을 던졌고, 꿈꾸던 삶은 손쉽게 답을 내놓았다. 작은 독립출판사를 열어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출판도 하고,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주제로 매거진도 만들고 싶었었다. 바다 근처 마당 있는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식사하며, 함께 웃고 함께 떠드는 일상을 꿈꿨었다. 날씨가 좋은 날엔 태닝이나 서핑, 바다 수영을 즐기는 건 덤.



   더 이상 잃을 게 없었기에 그 답들을 현실로 옮기는 일은 쉬웠다. 그래서 2021년 12월 31일, 강원도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29살의 마지막 날이었고 짐은 가벼웠지만, 두 번째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제법 무거웠다. 



   앞으로 매달 써 나갈 이 책은 2022년 1월 1일부터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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