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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Sep 11. 2023

닮은 바다

   주문진에서 영진해변을 지나, 짙은 녹색 빛 소나무 숲을 지나면 사천해변이 나온다.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해변과 낮은 상가들이 소박하게 이어져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해변이다. 강원도에서 작은 해수욕장을 꼽는다면 빠지지 않을 만큼 끝에서 끝이 사이좋게 가깝다. 해변과 도로를 구분 짓는 그 흔한 난간이나 나무도 없고, 모래사장의 폭도 짧다. 제아무리 여름이라도 바다에 뛰어노는 관광객 머릿수가 눈에 훤할 만큼 찾는 이도 드문드문이다. 그래서 가장 마음이 뺏긴다.



   해변마다 천성과 생각과 마음이 다르다. 어느 해변은 잠깐만 들려도 기가 빨려 얼른 자리를 뜨고 싶고, 어느 해변은 유쾌한 기운이 있어 괜히 들뜬다. 사천해변은 가까워지려 바다에 들어가면 금세 밀어내는, 한 낯가림하는 녀석이다. 해안지형이 들쑥날쑥이라 수심이 금방 머리를 넘겨 허우적대게 하니까. 같이 놀고 싶은 마음에 서핑을 시도해도 파도를 쉽게 주지 않아 괜히 서운해진다. 하지만 조용히 앉아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스치는 바람에 옅은 여운을 남기고 가는, 그런 해변이다. 



   그래서 가끔 그곳을 찾는다. 타인에게 못된 사람이 될까 무서워 진심을 숨기는 내가 겁쟁이 같을 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실수와 실패가 스스로를 부끄럽고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 때. 그럴 때면 책을 옆구리에 단단히 차고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몇 없는 카페 중에서 사람이 가장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간다. 음료를 시키고 앉아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본다. 21세기 변태같이 휴대폰도 꺼내지 않는다. 책도 차에 두고 왔지만 나가기 귀찮으니 그냥 그대로 앉아 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때 그러지 못했을까. 라는 단어들을 마음 여기저기 어지럽게 던지며 그냥 그대로 앉아만 있다.



   사실 알고 있다. 뚫어지게 앉아 가만히 바다를 바라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아무리 유명한 책의 어느 구절과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명언을 머릿속에 아로새겨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게 ‘나’라는 사람의 천성과 생각과 마음이다. 위로는 되겠지. 하지만 같은 상황을 마주하면 머릿속 적어 둔 메모에 물이라도 끼얹은 듯, 까맣게 번져 또다시 마음에 쭈글쭈글한 얼룩이 생긴다.



   다만 사천해변을 찾는 이유는 닮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그런 심정. 누구처럼 그릇이 크지도 않아 작은 꿈들을 소박하게 정해두고 천천히 이루어 가는 사람이니까. 나를 찾고, 내가 찾는 사람도 눈에 훤할 만큼 인간관계 폭도 좁다. 누군가 먼저 다가와도 금세 뒷걸음질 치며 밀어낸다. 내 사람이다 싶으면 지극 정성인데, 그마저도 발길이 끊겨 드문드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천해변은 나와 참 닮았다.



   커피를 다 마실 때 즈음이면 마음 여기저기 어지럽게 던지던 단어의 개수도 조금은 줄어든다. 해답이나 해결은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그런 천성과 생각과 마음을 가진 게 혼자만은 아니구나 싶어서 위안이 된다. 세상에 혼자만 덩그러니 던져진 건 아니구나 싶은 그런 위안. 나와 닮은 바다를 알게 돼서 그래도 다행이구나 싶은 그런 위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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