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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Sep 11. 2023

민재가 왔다 - 1

맛집

   민재가 왔다. 부산에서 이곳, 강원도로 오는 여정이란 웬만한 동남아 여행지에 가는 것과 맞먹는다. KTX도 없어, 비행기도 없어. 자차로 꼬박 5시간을 넘게 달려야 한다. 그 귀한 연휴를 친구 본다고 강원도까지 찾아온 마음이 대견해 나도 덩달아 모든 스케줄을 비웠다. 잠이야 우리 집에서 자면 되고, 물놀이야 당연히 하는 거니까 맛집이라도 알아볼 생각으로 ‘강릉 양양 맛집’을 검색했다. 맛집을 검색하다니, 어색했다.



   맛집을 찾아간 기억이 가물가물이다. 1년 넘게 살다 보니 이곳이 그 유명한 관광지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이동하며 지나치던 카페나 식당마다 연예인 누가 왔다 간 곳이래. 방송에 나와서 엄청 유명해졌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인플루언서도 줄 서서 먹었데. 그러거나 말거나 가게 밖에서 발 동동 굴리며 웨이팅 하는 사람들을 보면 ‘굳이 저렇게까지 해서 먹고 싶나?’ 싶더라. 집밥주의자인 나에게 맛집 웨이팅이란 너무나 멀고도 이해 불가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유명하진 않으면서 별점 높은 카페 서너 곳과 음식점 두 곳을 찾아 놓았는데, 민재 지가 가고 싶은 맛집들을 먼저 들이밀었다. 휴, 다행이었다. 운전도 번지르르한 외제 차보다 남이 태워주는 차가 제일 편한 법이다. 조수석에서 운전자 취향을 저격할 만한 선곡을 틀어 주는 마음으로 민재가 찾아온 맛집 음식을 먹으며 신나게 리액션할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 대기 번호 204번이면 204팀을 기다리라는 건지, 당일 204번째 손님이라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대기표를 받고 바라본 웨이팅 행렬은 고속도로 옆 송전탑에 걸린 전신줄 마냥 느슨하게 축축 처져 있었지만, 절대 쓰러질 일 없을 만큼 단호하고 웅장하게 뻗어 있었다. 



   오다가다 많이 봤고, 본 것의 몇 배로 많이 들어본 음식점이었다. 그런데 그 매장 앞에 내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30분이 지났을까. 손님들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걸 보니 묘한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까지 기다린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어디 얼마나 맛있나 존버해 보자고. 1시간이 흘렀을까. 희망이 점차 잦아들고 극도의 기대감이 육체와 정신을 지배했다. 편의점 가서 컵라면을 먹어도 미슐랭 쓰리 스타 요리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만큼 허기지고, 민재와 허허실실 주변 풍경이나 바라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는 게 꽤 즐거웠다.



   결국 먹었고, 음식은 맛이었다. 아무리 배가 고팠다 해도 왜 유명한지 정도는 이해할 만한 맛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웨이팅하는 동안 겪은 낯선 감정들이 의외로 유쾌했다. 



   민재가 돌아간 이후, 차트 상위권에 있는 아이돌 노래 몇 곡을 리스트에 저장해서 빠짐없이 들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아이돌 노래도 몇 곡 저장했다. 신화 팬이었던 누나의 극성맞은 행동을 보고 자라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마치 웨이팅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정하고, 맛집 앞에 줄 서 있는 사람을 이해될 수 없는 사람으로 단정 지은 것처럼. 해보니 알겠더라. 웨이팅도 해 볼 만한 가치가 있고, 아이돌 노래도 이렇게 좋은지를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이 점처럼 좁아져 있었다. 단지 ‘이해 안 됨’이라는 단어를 무기 삼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움을 일상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몇 없는 익숙함 만을 세상 전부로 여기며 살았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누군가 했더니, 다름 아닌 ‘나’였다. 



   심심하고 울적하지만 ‘이게 나야’라며 정신 승리하던 밤들은 변화를 원하던 겁쟁이의 포기 선언 현장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처럼 지금도 설레는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서른 넘어 겁먹었다고 하면 놀릴까 봐 이해 안 된다는 핑계를 앞세운 건 아닐까. ‘나다움’은 평생의 과제인 걸 모르고, 이미 끝냈다고 마침표 찍은 내가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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