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함
부산, 본가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생각보다 별다른 것 없다. ‘우리집’은 오직 그곳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늦잠을 자려 어리광을 부리고 부모님이 모두 출근하고 나서야 부스스 일어난다. 그리고 언제나 그곳에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냉수 한 사발을 마시고 안방으로 직행한다. 텔레비전을 켜고, 엄마와 아빠의 향이 녹아 있는 이불에 몸을 던진다.
오랜만에 보는 텔레비전에 푹 빠져 있다 어릴 적 하던 놀이가 생각났다. 안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개장과 서랍 등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뭐가 있나?’ 구경하는 것. 염주와 포커 카드, 고스톱, 인주 등은 최소 20년 전부터 그 서랍에 그대로 있었다. 아빠가 예전에 쓰던 가죽 지갑과 선글라스도 그랬고, 초등학교 때 내가 사 놓은 윷놀이 세트도 그랬다. 천천히 안방 구석구석에 숨은 옛 추억들을 발굴하다 엄마의 화장대 서랍에 있는 보석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 역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곱게 정돈된 자개 보석함 속에는 오래된 옥가락지 한 쌍과 초록색 보석이 박힌 반지, 진주 귀걸이와 팔찌 그리고 작고 빨간 복주머니에 넣어둔 금반지가 있었다. 창을 넘어온 햇빛이 방안의 자개 가구들에게 고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오전 11시 즈음이었다. 그리고 열린 자개 보석함에선 오래된 책에서 나는 옅은 초콜릿 향이 피어났다. 그 속에서 가장 빛나는 건 보석이 아닌, 사진 속 젊은 엄마와 아빠의 결혼사진이었다. 흑백이었고, 두 분은 밝게 웃고 있었다.
어릴 땐 자개 가구와 소품들이 그렇게도 촌스럽게 느껴졌지만, 언제부턴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오래도록 곁에 있을 때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너무 아픈, 너무 혹독한 고난들을 함께 겪었지만 여전히 서로의 버팀목으로 남아 밝게 웃어주는 우리 부모님처럼 말이다.
보석이 아무리 비싸고 빛나도 여전히 그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엄마의 마음에는 견줄 수 없다. 서로를 한없이 믿고 곁을 지키는 건 참 어렵지만 참 고운 마음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