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자리와 태닝오일이 담긴 파우치를 옆구리에 단단히 차고, 100p 정도 남은 김훈 작가님의 장편 소설 ‘하얼빈’과 카메라, 수건을 양손 가득 든 채로 해변으로 들어섰다. 걸을 때마다 알맞게 데워진 6월의 모래가 조리와 발바닥 사이로 들어오면, 까끌까끌한 감촉과 눈 부신 햇살이 사이좋게 뒤엉켜 탱고 춤을 추듯 경쾌함이 발끝에 묻는다. 무대는 한가로운 지경리해변. 음악은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촘촘하게 밀렸다 빠지기를 반복하는 파도. 나는 핀 조명을 따라 춤을 추는 댄서처럼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은박 돗자리밖에 없던 다이소에서 찾다 찾다 찾은 커튼을 돗자리 대신 모래사장 위에 펼쳤다. 누가 봐도 돗자리 같은 커튼의 밑모서리 양쪽엔 조리를 벗어 한 짝씩 올렸고, 윗모서리 양쪽엔 오일, 수건과 카메라, 휴대폰을 짝 맞춰 올렸다. 웬만한 바람엔 끄떡없는 요새가 손쉽게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모자와 상의를 훌렁훌렁 벗은 다음 발에 묻은 모래를 훌훌 털며 요새 안으로 진입했다. 자세는 낮고 조심스럽게. 섣불리 들어갔다간 빈틈을 노리고 있던 모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침투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태닝을 하는 내도록 몸에 달라붙어 간지럽게 할 테니, 시작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돗자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손에 오일이 묻기 전에 사진 한 장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음악을 켰다. 그리고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골고루 오일을 바른 다음 수건을 베개 삼아 大로 뻗었다.
10년 동안 공들여 술을 저축해 온 아랫배가 기분 좋게 퍼질러졌고, 남자가 여자보다 왜 빨리 죽는지 몸소 증명하다 생긴 크고 작은 흉터들이 드러났다. 면도하지 않은 빡빡머리는 얼마 전부터 챙겨 먹기 시작한 탈모약 덕분인지 샤프심처럼 빳빳하고 촘촘했으며, 얼굴을 덮은 수염은 샤프로 꾹꾹 눌러 문제를 푼 수리 영역 시험지처럼 난해하고 난감하게 뒤엉켜 있었다.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웬 거지가 여기 있냐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뭐 어때. 빛의 속도를 암산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태양으로부터 출발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닿는 햇빛의 공식을 온몸에 빼곡히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런 시험지를 뒤집어 뒷장을 풀듯 몸을 뒤집어 등도 새카맣게 익혀주면 끝인가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되시겠다. 야외 태닝은 한 방향으로 오래 태우기보다 짧게 여러 방향으로 태우는 게 피부 건강에도 좋고, 그나마 균형 있는 색감을 내기도 좋다. 그래서 20분마다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옆으로 눕기를 반복하는 편이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볼 땐 구름을 보거나, 모래 냄새를 맡거나, 파도 소리를 듣거나, 햇살의 열기를 느끼거나, 여차하면 네 가지를 한 번에 한다. 엎드릴 때는 책을 읽는다. 친구들과 함께 가면 맥주도 마시면서 피크닉처럼 태닝을 즐긴다. 7월이면 수온도 시원해서 태닝을 하는 틈틈이 바다로 풍덩. 수영이나 스노클링, 조개 채집 등을 겸한다. 태닝이란 말보다 놀이에 가까운 것이다.
그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王자 없는 배를 까고 大자로 누워 있다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 바다에 발을 찔러 넣었다. 역시 아직은 아니었다. 기온보다 2개월 정도 늦는 바다 수온은 아직도 겨울 끝자락의 온도를 머금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돗자리 요새에 있는 카메라를 들고 와서 속이 훤히 비치는 맑은 바다를 찍었다. 조금 더 가까이. 한 발 한 발 전진하다 어느새 밀려오는 파도가 정강이를 쓸어 넘기는 깊이까지 들어가 있더라. 만족스러운 사진이 찍혔다 싶을 때 한기가 느껴졌고, 그때야 뒷걸음질 치며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태닝을 마저 하기 위해 돗자리 요새로 돌아가는 길에 주변을 살피니,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은 관광객이 해변 여기저기를 점유하고 있었다. 50m쯤 떨어진 곳에선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싶은지 바다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로 추측되는 분이 ‘안돼!’라고 소리 치며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는 남매 중에서 누나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거리는 멀었지만 서로의 시선이 일직선상에 놓여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가벼운 그 인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는 고개를 떨구며 자신들의 텐트로 들어갔다. 해변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텐트나 파라솔을 펴서 햇빛을 단단히 차단한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넓은 지경리해변에 토실토실한 아랫배와 흉터들, 지저분한 수염과 빡빡머리를 홀라당 드러내고 햇빛을 맞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王자 없는 배를 까고 大자로 뻗었다. 후. 방금 전의 한기는 온데간데없이 온몸에 땀이 맺혔다. 시간은 오후 1시가 코앞이었고 온도는 29도, 바람 없는 날이었다. 태닝을 시작한 지 이제 막 4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람들이 주변을 오가는 소리가 점점 다양해졌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은 체 탱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남미 식당에서 타코와 코로나 맥주를 먹는 상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