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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Sep 18. 2023

견우의 봄 산책



   봄은 너무 재빠르다. 언제 달의 시간을 훔쳐 해에게 줬는지. 분명 어제의 오후 6시는 세상 어둑했는데, 오늘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세상 낯빛이 훤했다. 오후 7시가 코앞인데 참, 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런 기이한 현상이 하루 사이에 일어나나 싶다가, 어제가 1주일 전인지 2주일 전인지 헷갈렸다. 하여튼 밤이 2시간 정도 늦어졌으니, 인생에 2시간 정도를 공짜로 받았다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며 쌓인 원고 작업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그 정도 결심이면 아인슈타인도 인정했을 게 분명한 시간 여행이라서 상대적으로 매우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곰곰. 고민하는데 무려 20분을 사용했지만 결론은 만족스러웠다. 그래! 산책이 딱인 것이다.



   영진해변으로 통하는 작은 다리 앞에 다다랐을 때, 웬 새들이 하늘에 드러누워 바람이 잡아끄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꽁무니 밑으로 빨간색과 파란색과 노란색과 색색의 등대들이 수평선을 재단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영진의 바다가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저 새들은 까치와 까마귀 일게 분명했다. 오작교같이 들뜨는 마음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는 나는 견우.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바다는 직녀.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봄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처럼 빠르지만, 그래서 애틋함이 은하수처럼 쏟아진다. 그런 봄 위를 산책하는데 저 새들이 까치와 까마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지 알 길이 없었다. 가까워진다. 가까워져. 노을 지는 직녀를 얼른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자고로 영진해변이라 하면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시작해서 지은탁과 유신(극 중 김고은과 공유의 배역 이름)으로 끝나는 그런 해변이다. 정말 드라마를 안 보는 나도 도깨비만큼은 시작과 끝을 함께한 작품이지만, 7년을 우려먹는 건 너무했다. 김고은은 그 7년 사이에 드라마 7편과 영화 5편, 2번의 팬 미팅을 했다. 강산도 변하기 일보 직전인데 변할 생각 없는 도깨비 촬영 현장 팻말은 도깨비보다 더 끈질기게 세월을 버티고 서있다. 빛이 바랠 대로 바랜 나머지 은탁이가 유신에게 건네주는 게 꽃인지 팥죽인지 구분도 안 되는 그 팻말을 지나 강원도립대 후문 즈음에서 모래사장으로 들어섰다. 



   노을이 깔린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으며 ‘노을 위를 걸으면 이런 기분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 위로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선선하게 뿌려져 산책의 감칠맛이 한층 도드라졌다. 



   뉘엿뉘엿. 달이 해를 재촉했는지 하늘과 수평선과 바다와 등대들과 도깨비 촬영지와 팻말과 해변에 서서히 어둠이 깔렸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뉴진스의 ‘Hype boy’가 시작되고 끝나는 사이에 밤이 되었고, 나는 홍대가 아닌 해변 끝에 도착해 있었다. 왔던 길은 낮이었지만, 되돌아가는 길은 밤이다. 낮과 밤이 오고 감을 주고받으며 평화롭게 헤어진 만큼, 견우도 직녀와 뒤끝 없이 헤어져야 하는데 자꾸만 질척거리며 해변을 맴돌았다. 감칠맛의 여운이 오감에 맴돌고, 맴돌다 마음에까지 스미는 통에 내일도 산책하지 않으면 상사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마치 패잔병처럼 아쉬움을 질질 끌며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디선가 폭발음과 함께 짙은 화약 냄새가 풍겼다. 아차차. 우리는 휴전 중이었다는 생각과 영진해변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38선휴게소가 또 한 번 뇌리를 스쳤다. 서, 설마?!



   설마 그럴 리가. 펑! 펑! 수십 발의 폭죽이었다. 



   은하수가 남기고 간 별빛에는 만족하지 못 하는지 인공적인 그것을 잔뜩 사다가 펑펑 터트리고 있었다. 한 무리가 쏘아 올리니 다른 무리가 찾아와 폭죽의 향연을 이었다. 오리온자리의 명치 부근에서 폭죽 빛이 터졌고, 그 충격에 피를 토하듯 뿌연 연기가 밤하늘로 뱉아졌다. 적들의 선제공격에 거대한 오리온이 쓰러진 상황에서 까치와 까마귀들은 퇴각을 명령받았고, 견우와 직녀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곳에서 변함없이 빛나는 별들과 터지면 사라질 폭죽들 사이엔 넘나들 수 없는 선이 그어졌다. 나는 그 선을 따라 집으로 도망치듯 후퇴했다.



   집으로 통하는 작은 다리 앞에 다다랐을 때, 오리온은 다시 원기를 회복했는지 벨트를 단단히 묶어 매고 밤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역시 행복은 언제나 그곳으로 되돌아오는 봄과 별처럼 지극히 일상적이고 변함없는 것들의 편이었다. 재가되어 사라질 소리는 계속해서 뒤따라왔지만, 행복의 편에 서 있기에 걱정 없이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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