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기세가 여름과 마지막 실랑이를 하는 4월이면, 옷장을 맴도는 손이 우유부단해진다. 얇은 패딩은 추울 것 같고, 두툼한 건 더울 것 같고, 반팔을 입자니 밤이 서늘하고, 니트나 맨투맨을 입자니 낮이 답답할 것 같다. 옷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일찍 준비한 여유를 야금야금 잡아먹다 약속 시간인 오전 10시를 코앞까지 앞당겼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흰 반팔에 회색 니트를 입고, 어차피 다 청바지니까 색만 대충 골라서 다리를 찔렀다. 조급한 마음에 엄지발가락이 걸려 휘청. 양말은 생략이다. 바다마을의 4월이면 조리가 딱이다. 외투는 대충 손에 잡히는 카키색 누빔 재킷으로 골라 허겁지겁 남애1리 해변으로 향했다.
오픈 준비 중이었다. 카페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다 해서 갔지만 로제 떡볶이와 밀크셰이크, 그리고 커피나 맥주, 칵테일까지 파는 바였다. 인테리어는 동남아 휴양지에 있는 로컬 식당 같았고, 가게 구석엔 결을 맞추려는 듯 드럼과 기타 등의 악기가 있었다. 발리의 여느 라이브 바가 떠올랐다. 와인색 비니를 푹 눌러쓴 남자가 3M 목장갑에 드릴을 쥐고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고, 머리가 짧은 여자가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어떻게…” 갸우뚱. “알바 면접 보기로 한 사람입니다.” 뒷문으로 나가더니 역시나 조리를 신고 체구가 작은 남자를 불러왔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그에게 호통을 치는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그가 사장님이었다.
구석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로를 잠시 쳐다봤다. 입을 먼저 뗀 건 사장님이었다.
"아! 커피. 커피 괜찮아요?"
"네. 좋습니다."
최대한 단정하고 꾸밈없이 대답했다. 몇 분 후 자신의 텀블러와 머그잔을 양손에 들고 돌아왔다. 잠시 동안 그는 내 눈을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준비해 온 이력서를 가방에서 꺼내려는 데, 그가 입을 뗐다.
"아! 노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노트와 팬을 들고 돌아왔다. 펼친 노트를 몰래 훔쳐봤을 때 별 내용은 없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고, 어떤 답을 할지 긴장하고 있었다.
"이름이...?"
"탈고입니다."
"지금 사는 곳이 어디세요."
"주문진 원마트 뒤편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깝네요."
잠시 정적을 두며 이리저리 나를 훑어보는 눈치였다. 눈길을 뗄 때는 가게 슬라이더 통 창문 너머의 남애1리 바다를 이리저리 짚었다. 그리고 입술을 한번 적시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보시면 알겠지만 좀, 뭐라고 해야 하지. 아싸? 좀 아싸들이거든요."
"예?"
"우디 님이 좀 인싸 같아 서요. 저희는 아싸를 좋아해서… 근데 어디 사신다고 하셨죠?"
"주문진 그 원마트..."
"아! 맞다. 죄송해요."
그 이후로 어디 사냐는 질문을 2번 더 들었다. 사장님은 자주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그렇게 15분 동안의 짧은 면접이 끝나고 가게에서 나왔다. 정말 기괴하고 어떤 의미에선 무서운 면접이었다.
강원도 양양엔 표면상으로 보이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구인 관련 애플리케이션을 봐도 서핑 숍, 카페, 게스트하우스나 펜션 등. 관광지에 걸맞은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그것마저 연초엔 자리가 없다. 5월이나 6월이 돼야 일자리가 쏟아지고, 그 전엔 조용한 바다만큼 구인 애플리케이션의 ‘양양’ 검색 페이지도 조용하다. 그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올라온 구인 공고가 바로 이곳이었는데, 아싸를 선호하다니. 20대를 아싸로 살아온 걸 증명하기에 15분은 너무 짧았다. “저 아싸입니다! 아싸라고요!”라며 때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려서부터 아싸를 자처해 왔다. 취업이 잘될 만한 전공은 생각조차 안 했기에 예술 한답시고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감독을 꿈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을 쓸 기회가 생겼고, 금세 빈 종이를 채워 나가는 일이 좋아졌다. 하지만 남들은 취업하고 돈 벌기 시작하는데, 정작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사회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사회 밖을 함께 맴돌던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안으로 들어가거나,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조급해졌다. 그래서 그나마 글이 주 콘텐츠인 회사에 취업했지만, 하고 싶은 일과 정작 하는 일은 서로를 무시했다. 마음은 내 글을 쓰고 싶은데, 손은 남이 시키는 글을 쓰고 있었다. 사회 안으로 들어왔지만,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삶의 아싸로 살아왔는데 인싸라니… 잠깐! 겉모습만 보고 그랬다면 어쩌면 칭찬일지도?
저녁에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낮에 면접 본 곳입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 가능하세요? 며칠 일해보고 웨이팅까지 있는 유명 맛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장님에서 형으로 호칭이 바뀌기까지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고, 형은 술을 좋아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친해진 형에게 그때 말한 아싸가 어떤 의미였냐고 물었다. 답은 여러 가지였지만 나름 정리해 보기를 이곳스러움과 도시스러움의 차이 정도였다. 이곳스러움이라.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제부터 이곳에 살아가면서 차츰차츰 알아가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내가 바라던 삶의 인싸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숍에서 겪게 될 일들도 범상치만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