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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Sep 14. 2023

화분 너머의 세계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마오리 소포라’(이름: 알로)의 잎이 변색되기 시작했다. 노랗게 질린 사람처럼. 뚝 하고 떨어진 온도에 놀란 건지, 물주기가 잘못된 건지 이리저리 살피다 아차 싶었다. 화분 바닥 배수 구멍으로 뿌리가 빼꼼하고 나와 있었다. 분갈이 시기를 놓친 것이다. 



   냉큼 주문한 토분이 도착한 날, 대대적인 이주를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알로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집으로 들인 녀석들 대부분이 분갈이를 원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점점 커서 더 넓은 집을 원했는데, 물만 주면 된다고 확신했던 무심함이 미안했다. 



    분갈이하며 썩은 뿌리를 자르고, 잎도 정리했다. 영양 가득 싱싱한 배양토로 마무리하고 나니 마당이 엉망진창이더라. 빗자루로 정리하며 ‘적당히 자랐을 때 미리 할 걸, 꼭 비좁아 터져야 하냐’라며 스스로 핀잔을 주는 와중에 아차 싶었다. 마음 바닥으로 외로움이 빼꼼하고 나와 있었다. 사람에게도 무심해져 있었다. 



   마음을 준다는 것에 ‘왜?’라는 팽이를 세차게 돌리며 일상에 침범하려는 모든 것을 튕겨내고 있었다. 팽이의 원동력은 ‘내 것’. 내가 좋아하는 것만 챙기자는 고집으로 그렇지 못한 모든 것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이기적으로 살기’, ‘모든 이에게 친절할 필요 없다.’ 등의 말에 가스라이팅 당해 점점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나에게 맞춰 평가하는 지경에 이르는 중이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면 거리를 두고, 불과 말 몇 마디에 나와 틀린 사람으로 단정 지은 적도 있다. 그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더니, SNS를 열심히 하는 모든 불특정 다수를 가면 뒤에서 숨은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기적으로 살려는 어설픈 생각과 행동이 위선으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이기적으로 사는 것에 한도 초과가 있다면 지금 같다. 내 사람이라 확신했던 이도 나에게 먼저 거리를 두면 속절없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잘하는 건 아니기에 실수나 실패가 잦아지면 지치고, 상처만 쌓인다. 강원도로 이사하며 상황과 환경은 계속 바뀌는데, 마음의 크기는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좁아 터진 냉장고에 입맛에 맞는 요리만 해 먹겠다며 식재료를 가득 채웠는데, 혼자 다 먹지도 못해 썩어갔다. 내 것이라고 결국 영원히 내 것일 수는 없기에. 외로움이라는 영혼의 썩은 뿌리가 왈칵 쏟아져 버린 것이다. 



   악착같이 내 것만 챙기기 시작하면서 언젠가 고독해질 거란 예상은 했는데, 외로움이 튀어나올지는 몰랐다. 식물도 언젠간 더 넓은 화분으로 옮겨 심듯, 사람 마음도 크기를 넓혀야 하는 시기가 있다. 방법은 잘 모르지만 마음이 커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가 중고등학교 때나 20대 초반인 건 확실하다. 그땐 다양한 사람을 경계 없이 만났었다. 그때 넓어지던 마음이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무분별하게 경계를 넘나들며 상처만 남기고 가버린 몇몇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받겠지,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자존감 낮아지는 순간도 있는 게 사람 만나는 일이지만, 그걸 멈추고 살았더니 정말 중요한 걸 담아야 하는 순간에 빈 공간이 없었다. 주변을 살피고 새로운 관계를 틔우는 건 마음이 하는 몸통 박치기 같다. 부딪치는 순간엔 아프지만, 조금씩 ‘곁’을 내줄 공간을 넓혀가는 용기 같은 거 말이다.



   외로움에서 오는 찌질함도 잘라내고, 새로운 사람도 알아 가면서 마음을 조금씩 넓혀 갈 때다. 그런 시기가 있다. 넉넉하게 내 곁을 내어주고, 나도 누군가의 곁에 기대고 싶은 시기. 마음이 좁아 터지면 그 시기가 와도 지금처럼 왈칵 쏟아질 뿐, 보듬어 안아줄 여유는 없다. 내가 너를 그리고 네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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